슬로우시티 경주에서 나눔의 교훈을 얻다
슬로우시티 경주에서 나눔의 교훈을 얻다
  • 강귀일 기자
  • 승인 2016.03.31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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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각 고을에는 향교(鄕校)가 있었다. 지방교육기관이면서 선현을 제사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校洞) 또는 교리(校理), 교촌(校村)으로 부른다.

경주교촌마을도 이곳에 향교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경주향교.

◇ 경주향교

경주향교는 여느 고을에 있던 향교와는 격이 다르다. 신라시대 국립교육기관이었던 국학(國學)이 있던 곳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중등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하여 창건됐다. 국학은 신라 신문왕 2년(682)에 설치됐다는 기록이 전한다.

현재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돼 있다. 대성전과 명륜당, 동무, 서무, 사청, 내신문(內神門) 등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 교촌마을.

◇ 교촌마을

경주 교촌마을에는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인 경주최씨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인 경주교동법주가 자리잡고 있다.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던 경주 최부자집도 이 마을에 있다.

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교촌마을

이 마을에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부근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계림과 내물왕릉,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재매정이 있다.

▲ 월정교.

◇ 월정교

교촌마을에서 월성 쪽으로 가는 길에 월정교가 복원되고 있다. 이 다리는 경주 월성 서남쪽 해자(垓子)를 가로지르고 있다. 지붕이 있는 목조 다리인 누교(樓橋)이다.

문화재청은 이 다리 양편에 문루(門樓)를 복원하고 있다.

원효대사가 요석궁에 들어갈 때 이 다리를 건넜던 것으로 전한다. 이때 원효대사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리요,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만들겠노

▲ 경주 교동법주.
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한다. 무열왕은 그 노래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요석공주에게 원효대사를 보내도록 한다. 원효대사가 경주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월정교를 지나다가 자신을 찾고 있는 신하를 보고는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빠지니, 신하는 월정교 바로 옆의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머물게 됐다. 이때 얻은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고, 이후 원효대사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60년 경덕왕(景德王 19) 때에 “궁궐 남쪽 문천(蚊川) 위에 일정교(日淨橋), 월정교(月淨橋) 두 다리를 놓았다”는 기록이 있다. 춘양교(春陽橋)라고도 불리었던 일정교는 월정교의 동쪽으로 약 700m 상류에 위치해 있었다. 월정교는 조선시대에 와서 月精橋(월정교)로 표기됐다.

글·사진 강귀일 기자

▲ 교촌마을 담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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