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유언(遺言)
뜨거운 유언(遺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3.0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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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2월, 일제의 억압 속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민족적 거사를 도모하게 된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천도교 측의 독립선언서 원고 지침에 따라 육당 최남선이 기초했다. 인쇄는 천교도 측이 맡았는데 27일 밤 종로 보성인쇄소에서 2만 1천 장을 인쇄, 전국 주요 도시에 은밀히 배포했다.

드디어, 3월 1일 오후 2시 즈음 민족대표들은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서 주인 안순환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미리 전화를 걸게 했다. 이곳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축배를 든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이어 출동한 일본 경찰이 포위한 가운데 한용운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나머지 민족대표들이 제창한 뒤 곧바로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다.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이날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아 군중들이 혼란에 빠지자,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 만세를 부른 뒤 시위에 나섰다. 만세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멀리 만주 지역과 미주(美洲),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민족 모두가 하나가 되어 나라의 독립을 애타게 부르짖었다.

그 무렵, 대한민국의 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오던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이 시작되자 이화학당 교장의 만류를 뿌리친 채 시위에 참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고향인 천안에 돌아와서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4월 1일,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열사는 온갖 역경에도 굴하지 않았다. 오로지 대한독립이라는 시대적 사명만을 생각했다.

그즈음 만세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일제의 만행은 극에 달했다. 일본 헌병들은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의 선두에 선 유관순 열사가 보는 앞에서 총검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처참히 살해했다. 하지만 열사는 이에 굴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다 끝내 일본군에 체포되고 말았다.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유관순 열사는 잔인한 고문으로 살이 썩어 들어가는 고통을 겪었지만, 끝끝내 굴하지 않았다. 그는 ‘내 나라 독립을 부르짖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되는가. 국권을 침탈한 일본이 어찌 나를 심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라며 분연히 맞섰다.

유관순 열사는 형무소에서도 틈만 나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3·1운동 1주년이 되는 해에는 형무소 전체의 만세운동까지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심한 고문을 당해 방광이 파열되는 중상까지 입었으나 그는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 배를 밟는 단순 구타가 아닌 잔인한 구타와 고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1920년 10월 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17세 꽃다운 나이의 유관순 열사는 모진 고문과 영양실조, 그리고 굶주림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내주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이화학당의 교장 미스 프라이와 교사 미스 월터가 일본인 형무소 소장에게, 국제사회에 만행을 알리겠다는 협박을 하며 시신을 내놓으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 끈질긴 항의 끝에 시신 상태를 세상에 알리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다음에야 시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열사의 시신은 얼굴이나 몸통, 어디 성한 데가 한 곳도 없이 처참하게 훼손되어 있어 보는 이들의 통곡을 자아냈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서슬이 시퍼렇던 일제강점기. 바로 그 암울했던 시절에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유관순 열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가슴 절절한 유언이다. ‘대한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이 힘차게 울려 퍼졌던 그 3월을 다시 맞으며, ‘뜨거운 유언’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본다.

김부조 시인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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