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꽃핀 방어진회 ③
일본에서 꽃핀 방어진회 ③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2.21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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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히나세촌 답사에는 필자가 몇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방어진 신사(神社) 안에 고래 턱뼈가 쌍으로 서 있었는지? 서 있었다면 무엇을 상징하는지? 등이 궁금했다.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간행한 ‘일제강점기 울산 방어진 사람들의 삶과 문화’에 실린 고래 뼈에 관해 인터뷰를 했던 (川崎實雄)가와사키 지쓰오, 1930년생씨를 만나서 확인해보고 싶었다.

“방어진 신사 내의 계단 아래 세워져 있었는데, 최근에는 울기등대 쪽으로 옮겨져 있었다”고 말한 것에 대한 재확인이었다. 그는 대왕암공원에 세워진 고래 뼈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한 장 꺼내어 보여주었다. 또 방어진 약도를 그린 (石本一枝)이시모토 가츠에, 1927년생씨는 고래 턱뼈가 방어진 신사가 아니라 ‘에비스 신사(?比須神社)’ 안에 서 있었다고 했다.

고래 뼈의 출처에 대해서는 포경업에도 관여한 (林兼)하야시카네의 나카베 이쿠지로가 다른 사업장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고래의 큰 턱뼈가 있어서 얻어다가 세운 것으로, 일본의 다른 신사에는 볼 수가 없고, 또 어떤 신물(神物)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가와사키씨는 방어진에서 태어나서 방어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15세 때에 종전으로 할아버지의 고향인 ‘히나세’로 오게 되었는데, 벌써 85∼6세가 되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1살짜리 막내 동생이 있었는데, 당시 어머니는 젖이 잘 나오지 않아 큰 고민을 하고 있었다. 전쟁 때라 쌀이나 곡식은 배급제로 지급받기 때문에 여유가 있을 수 없었고,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도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 험난한 바닷길이었다. 그때 이웃의 한국인 아주머니가 조그만 쌀자루를 이고 왔다. 맷돌에 간 쌀가루가 한 되박이 넘게 들어 있었는데, 히나세 가는 동안에 아이 미음이라도 쑤어 주라면서 ‘잘 가시라’는 인사말과 함께 전해주고 갔다. 그 후 우리 가족들은 이 일을 잊지 못했다.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리고 그 고마운 분들이 살아계시기를 소망했다. 1980년도 초에서야 그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릴 수가 있었다. 사(史)씨 자제분들이 방어진에 살고 있는데, 지금도 교분을 나누고 있다.”

3일차에는 방어진 약도를 그린 (石本一枝)이시모토 가츠에씨를 만나서 방어진의 옛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니시자키’씨가 자기 어머니의 친구인 ‘가쓰에’씨를 미리 자기 집으로 모셔다 놓았다.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필자도 방어진 약도를 확대복사하고, 질문지를 미리 준비해서 갔다.

우선 가벼운 질문으로 70년 넘는 세월 동안에 일본 사람들의 성씨나 이름들을 어떻게 기억하는지를 물었다. ‘가쓰에’씨는 방어진에서 나고 자라면서 방어진국민학교를 나와서 학교조합에 취직했고, 일본인들을 상대로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학교조합비’를 수금하는 일을 했기 때문이라며, 일본인들은 가족 중에 학생이 없어도 학교조합비는 일본의 교육을 위해서 누구나 납부 의무를 진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약도 속의 지명 “이세방고개”는 한국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일본말로 옮긴 것이고, ‘슬도’를 ‘나마코시마(해삼섬)’라 한 것은 생긴 모양이 해삼을 닮아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라고 했다.

1970년대까지도 불리었던 청녹창, 히나세골목, 핫켄나카야 등은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했다. 가쓰에씨는 또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어떻게 사귀고 지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은 밀주를 많이 담가 먹었는데, 순사들이 밀주 수색을 나오면 ‘술동이’를 이웃의 일본인 집으로 옮겨놓았다가 순사가 가고 나면 다시 가져갔는데, 밀주 수색조 순사는 일본인 집에는 들어오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 술이 잘 익으면 술을 걸러다가 일본인들과 나누어 먹곤 했다”고 말했다. 또 한국인들은 밭에다 양귀비를 몰래 조금씩 심어서 말려두었다가 비상약으로 쓰기도 했는데, 순사에게 들키면 일본인 것이라고 핑계를 대 모면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인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것은 겨울철 한국인들의 구들난방 ‘온돌방’이었다고 했다. 일본인들은 다다미방에다 철판이나 돌 같은 불연재를 놓고 그 위에다 일본식 온돌 ‘코다츠’를 설치했지만 화재의 위험성이 높아 겨울철엔 화재가 빈번했다고 한다.

또 일본인 아이들이 일산리 바닷가와 낙화암 앞 바닷가(미포만)에서 큰 조개를 잡던 일과 방어진 통조림공장에서 버린 꽁치머리를 주어다가 게를 낚던 일, 낙화암 근처에서 야생버섯 ‘쇼오로’를 따던 일, 화장터 근방에서 ‘핫다게’란 버섯을 따러 다닌 기억에 이르기까지 옛날 어릴 적 방어진에서 겪었던 추억담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장세동 울산동구문화원 지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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