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통금 시절의 추억
야간통금 시절의 추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6.01.10 20: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나라에서 8·15 해방과 더불어 시행된 ‘야간통행금지’가 풀린 것은 37년 만인 1982년 1월 5일의 일이었다. 따라서 지난 5일은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지 24주년 기념일(?) 같은 날이었고, 이날 일부 방송은 1982년 이전 밤의 풍속도를 눈요깃거리로 내보내고 있었다.

50대에 속하는 장년 세대라면 기억이 한 움큼이라도 남아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줄여서 ‘통금(通禁)’ 혹은 ‘야통(夜通)’이라 불렸던 이 제도는 ‘통금사이렌’이 울리는 매일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의 올빼미 시간대를 철저히 지배하고 있었다. 이를 어기는 날이면 ‘빼도 박도 못하고’ 가까운 파출소, 경찰서의 피의자대기실 신세를 각오해야 했고, 새벽 4시가 지나서야 부스스한 행색으로 겨우 풀려 나올 수 있었다. 술김에 행패라도 부렸다간 재수 사납게 쇠줄 듬성듬성한 검은 경찰차를 타고 ‘즉결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다만 성탄(聖誕) 전야와 제야(除夜)의 종소리가 울리는 12월 31일 밤만은 ‘예외의 자유’를 만끽할 수가 있었다.

도회지에서 맞이하는 ‘통금시대’의 밤은 한마디로 요지경과도 같았다. 휴대전화의 ‘휴’자도 들을 수 없었던 시절, ‘꾼’ 기질 농후한 한량들에겐 더없이 요긴한 ‘해방의 시간대’이기도 했다. 어찌 보면 이들 꾼들에게 통금은 밤샘 노름과 ‘몰래 사랑’을 감싸주는 보증수표나 다름없었을지 모른다.

언론계 초년병 시절, 한동안 ‘경찰출입’ 완장을 찼던 필자에겐 남다른 추억이 염주 꾸러미처럼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여태 지워지지 않는 이야깃거리 둘이 있으니, 이 2제(二題)는 부산 영도경찰서와 해운대경찰서를 출입하던 시절에 생겨났다.

1970년대 말, 영도경찰서에는 정년퇴임을 눈앞에 둔 수사과장 한 분이 있었다. 이유는 묻지 못해 알 길 없지만 그에겐 늘 ‘베트콩영감’이란 별명이 트레이드마크처럼 따라다녔다. 노련하면서도 인간미 넘쳤던 그는 경찰교재를 펴내고 강의까지 할 정도로 수사계의 베테랑이었지만 진급(進級)사정이 있을 때마다 쓴 잔을 마시는 특유의 이력이 있었다. ‘이북(以北=북한)출신’이란 낙인이 주홍글씨처럼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주말 숙직 날, 베트콩영감이 당직휴게실(경찰서 안방)로 측근 몇몇을 불러 모았다. 계장 2명과 출입기자 2명. 그의 유일한 낙(樂)이라는 ‘고스톱 판’을 위한 특별초대였다. 통금시간이 막 지났을 무렵, 당직경찰관이 급보(急報)라며 방문 밖에서 뵙기를 청했다. “무슨 내용인가?” “신선동 OO에서 고스톱 판이 벌어졌다는 신고입니다.” “얼마짜리라던가?” 부하경찰관이 머쓱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 원짜리랍니다.” 베트콩영감이 너털웃음을 웃더니 명(命)을 내렸다. “야, 인마. 니들은 안쳐?” 신고 상황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 이듬해, 동부경찰서를 거쳐 해운대경찰서를 출입하던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간밤 상황 파악에 나서는데 낯익은 당직형사가 ‘특종거리’라며 건네는 쪽지가 있었다. 유명 가수의 통금위반 사건! 그 속사정이 흥미를 자아냈다. ‘행복’으로 대중가요 차트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던 가수 C씨가 수비(수영비행장)삼거리에서 단속에 걸렸고, 그 옆자리엔 묘령의 외간여인이 타고 있었다. 이 사건은 한양서 지가(紙價)깨나 날리던 부산의 모 주간지 연예 면 장식에 그치지 않고 일주일 뒤엔 전국 유명 주간지들이 앞 다투어 뒤따르는 진풍경으로 이어졌다. 야간통행금지가 사라진 지 어언 37년. 바깥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하지만 대한민국 경찰관의 일상은 크게 나아지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시민의 안전, 국민의 안녕을 위해 불철주야 노고를 아끼지 않는 우리 경찰관들에게 존경과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김정주 논설실장 >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