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之大刹·佛之宗家 통도사의 역할
國之大刹·佛之宗家 통도사의 역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10.26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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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통도사(주지 영배 스님)에서는 개산 1370년 ‘개산대재 영축문화축제’ 행사 기간 중 도량에 설치된 무대에서 많은 사부대중이 자리한 가운데 ‘통도사학춤’이 선을 보였다. 이번 공연은 통도사 백성 스님과 제자 5명, 모두 6명이 추었다. 통도사학춤은 사실 통도사 대중보다 오히려 사회에서 더 잘 알려진 독창적 불교 무형문화유산이다.

불교 “수행자가 웬 학춤, 그것도 조계종 스님이”하고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엄연히 통도사 중심으로 계승된 사찰학춤이다. 1976년 문화재관리국에 보고된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22호에 의하면, 1935년경 신경수 스님과 양대응 스님을 마지막으로 전승되던 사찰학춤이다. 1976년에는 ‘(양산)사찰학춤’, 1981년에는 ‘사찰학춤’으로, 2014년부터는 ‘통도사학춤’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통도사학춤은 고종 시대 초대 이월호 스님으로부터 2대 김설암 스님, 3대 신경수 스님·양대응 스님, 현재 4대 김백성 스님으로 전승되고 있다. 이 글은 통도사학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스님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데 의미가 있다.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스님은 통도사학춤 전승 계보에 맨 처음 등장하는 스님이다. 월호 스님에 대한 자료는 적다. 만산(晩山) 스님(1922년생)은 월호 스님에 대한 술회에서 “그 당시 범패 강사는 월호 스님이 하셨는데 그분은 소리가 좀 약했다”라고 했다. 혜륭(慧隆) 스님(1929년생)은 “통도사에 어산을 잘하신 분은 누구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월호 스님, 신동월 스님, 대산 스님 등 많았습니다. 그분들 소리가 아주 좋았습니다. 작법도 잘하고, 장엄도 다 잘했지요” 라고 대답했다(김용환·윤소희, 영남범패, 2010).

김설암(金雪岩, 1886∼1970) 스님은 통도사학춤 전승 계보에 두 번째 등장하는 스님이다. 통도사 주지(1929∼1934)와 통도중등학원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 “통도사·해인사·범어사 등 경남지역의 큰절 3곳이 힘을 모아 해동역경원(海東譯經院)을 설립해 한문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3개 사찰이 구하 스님과 함께 1934년 종무협의회를 구성하고 역경불사에 김경산·김설암·이고경·임환경·백경하·오성월·차운호 등 9명의 스님이 동참했다. 1970년 법랍 74년으로 통도사에서 입적했다. 하북면장을 역임한 지명구(池明九, 1943년생)는 통도사 뒤쪽 지산마을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면서 통도사의 크고 작은 행사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는 “이월호 스님과 김설암 스님과는 사가로 인연이 있다. 양대응 스님이 절에서 나와 사가에 살 때 담 하나 사이로 이웃에 살았는데 여름철이면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고 대청마루에서 장구 장단에 신명이 나 넓은 소맷자락을 너울거리며 춤추는 것을 여러 번 보아왔기에 지금도 그 때 스님께서 춤추시던 모습이 선하다”라고 회상했다.

신경수(辛景壽, 1893∼1965) 스님은 통도사학춤 전승 계보에 세 번째 등장하는 스님이다. 하북면 지산리 평산 출생으로 2년 과정의 명신학교를 졸업했다. 경남 양산시 하북면에 있는 보광중학교는 1916년 4월 ‘통도사 지방학림’, 1934년 4월 ‘사립 통도중학교’, 1945년 9월 ‘보광중학교’로 개교한 이래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학교의 졸업생으로 김포광, 신경수, 하민호, 양대응, 오택언, 김상문 등이 있었다. 신경수 스님은 보광중학교 2대(1950.8.3 1∼1950.9.30.) 교장을 역임했다(梁山市誌 상권 1012쪽). 그 후 경상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양대응(梁大應, 1897-1968) 스님도 통도사학춤 전승 계보에 세 번째 등장하는 스님이다. 1906년 통도사에서 세운 2년제 명신학교를 졸업했다. 전 신라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법산(法山) 스님(1939년생)은 “나의 은사인 양대응 스님도 통도사 스님이시죠. 그분은 34살에 통도사 주지를 했는데, 광복 1세 주지셨지요. 구하 스님 문중이지요.”(김용환·윤소희, 영남범패, 2010)라고 술회했다.

김말복(金末福, 1909~1985) 스님은 통도사학춤을 구술했다. 통도사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3년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전수학교를 거쳐 1936년 동경에 있던 불교계대학에서 수학했다. 1939년 3월 졸업과 동시에 통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1964년 3월 보광중학교 교장으로 취임해 정년퇴임했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스님은 보광중학교 7대(1964.4. 7∼1968.3.7.) 및 9대(1972.3.4.∼1975.2.14.) 교장을 역임했다(梁山市誌 상권 1012쪽).

조용명(曺龍溟, 1907∼2003) 스님은 통도사학춤을 구술했다. 본명은 조병구(曺秉球)다. 통도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일본어 사용과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펼쳤다. 2003년 6월 세납 97세로 입적해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모역에 안장됐다.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김백성 스님은 통도사학춤 전승 계보에 네 번째 등장하는 스님이다. 1981년 통도사로 출가한 이후 2015년 9월 말까지 449회를 추었다(수행 사정상 1997년 1월부터의 횟수임). 그 중 8회는 해외에서 추었다. 천도재, 수륙재 등 천도 의식에서 ‘작법’으로 134회(29.8%), 문화행사 등 교화 방편인 ‘학춤’으로 315회(70.2%) 추었다. 통도사학춤으로 불교를 전하고 통도사를 대내외에 알린 셈이다. 앞서 소개한 통도사학춤의 계승자와 증언자는 시대적으로 지식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파리는 식초로 유인할 수 없다’는 프랑스 속담같이 불교의 전법도 시의적으로 다양성이 필요하다. 그동안 한국불교의 전법은 법문·참선에 편중된 구조였다. ‘현대사회에서 불교의 근본적인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라는 질문에 한국불교는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국지대찰(國之大刹)이며 불지종가(佛之宗家)인 통도사가 먼저 나서야 한다. 지속가능한 시의적 전법의 필요성을 인식한다면 독창적 불교문화로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전통은 계승을 하면서 시대에 맞게 발전시켜야 한다. 통도사학춤에 대한 관심과 계승·발전에 노력이 있어야 할 이유이다.

※본란에서 ‘백성 스님’은 필자를 가리킴. -편집자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조류생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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