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 이야기 ② > 나라 구하는 길과 ‘조선 민족 갱생의 도’2.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주시경의 만남
<외솔 이야기 ② > 나라 구하는 길과 ‘조선 민족 갱생의 도’2. 기울어져 가는 나라와 주시경의 만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9.03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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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솔 선생의 서울 유학 시절, 나라는 개화의 물결이 한껏 힘을 받는 과정에 있었고, 선각자들도 활발히 노력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곧장 일본의 식민지로 이어지는 민족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당시 기득권층들이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밀려오는 외세의 물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라 안의 준비가 부실한 채 급속히 개화의 문을 연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1885년(고종 22년)부터 한일합방(→경술국치)이 되기 전까지 신식 학교가 세워지고 새로운 학교교육이 시작되면서 우리말과 글을 교과목으로 채택하고 우리 글로 쓴 교과서에 의하여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후 일본의 침략 야욕이 점차 표면화되어 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뜻있는 학자들은 우리말과 글의 연구뿐만 아니라 신식 교육 보급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런 가운데 1876년에 맺은 강화도조약은 그 내용이 너무나 불평등했고 그러한 상태에서 시작된 개화와 갑오경장에 의한 시대적 각성은 민족 자각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각종 저서와 신문, 잡지 그리고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글로 쓰기에 이르렀지만 외세의 물결을 받아 소화할 시간적 여유와 능력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도 주시경선생이 지은 ‘국어문법’은 우리 말본학의 창의적 체계를 구축한 것으로 국어연구사에서 획기적인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는 근대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국어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새김이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라는 민족주의의 언어관을 공유하게 했고, 주시경 선생의 ‘말·글·얼’의 삼위일체 언어관은 민족주의 언어관의 대표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 강습원(한글 강습원)’에서의 만남을 통해 우리말과 글의 교육뿐만 아니라 민족주의 언어관을 몸소 체득하였다고 ‘나의 걸어온 학문의 길’이라는 글 속에 잘 나타내고 있다.

주시경 선생은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닦은 신학문의 선구자였으며 민족정신의 형성 기반이 되는 말·글의 연구·보급을 통해 민족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신 분으로 1907년 상동교회에서 조선어 강습원(한글 강습원)을 설립해 일요일마다 한글을 가르쳤다. 최현배 선생은 1910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박동보성학교 안에 매주 열리던 조선어 강습원(한글 강습원)에서 주시경 선생의 강의를 들었고 1913년 3월 그 강습원에서 고등과정을 이수해 고등과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리고 17살 때인 1910년부터 1913년까지 조선어 강습원(한글 강습원) 고등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동기들과 함께 ‘한글모’의 특별회원이 되어 회원들과 함께 ‘한글모’를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1914년 여름방학에는 주시경 선생의 간곡한 부탁과 격려의 말씀을 듣고 부산 동명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개설한 조선어 강습원(한글 강습원)의 강사로 내려가 가르치다 주시경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서둘러 서울로 올라갔다. 주시경 선생의 죽음이 외솔 선생에게는 남달랐다는 것은 ‘나의 걸어온 문학의 길’이란 그의 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3. 나라 되살리는 길, ‘조선민족 갱생의 도’

외솔 최현배 선생의 신학문에 대한 향학열은 유독 남다른 데가 있었다. 1915년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그 해 단 한 사람만 선발하는 관비유학생으로 뽑혔다. 그러나 유학이 지정된 곳이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의 일어 한문과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희망하지 않은 학문을 해야만 할 것인가를 두고 오래 번민을 하다 결국 유학할 것을 결심하고 그 후 4년 동안 이 학교서 일본 문학과 한문학을 배웠다. 그러나 외솔 선생은 교육학을 다시 전공하여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문과 제1부를 졸업했다. 이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많이 당하기도 했다. 때로는 대학 재학 중에 항일 사상이 강하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에 불려가기도 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던 해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다. 귀국 후 병을 핑계로 고향 울산에 돌아와 동래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우리말을 연구하고 가르치면서 ‘우리말본’의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되찾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과 사회 개조를 위한 능력 배양이 우선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더 배워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사회 발전과 개선 방안을 연구할 목적으로 1922년 다시 일본 유학의 길을 떠나 교토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사회학을 전공했으나 민족 개조와 사회 개선의 근본책이 교육에 있음을 알고 교육학을 중심으로 한 철학, 윤리학, 사회학, 심리학을 두루 배우면서 우리말 연구의 이론적 기반을 차근차근 쌓아갔다.

외솔 선생은 교육학을 전공하면서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을 체계화하려는 학문적 목적 아래 1925년에 쓴 졸업논문은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설’이었다. 페스탈로치는 “교육학은 본질적으로 이성에 관한 깊은 과학이어야 한다”고 역설한 세계적으로 저명한 교육학자이다.

또 여름방학을 이용해 귀국해 전국 순회 강연회를 가지며 ‘우리말의 맞춤법’에 대한 강의를 했다. 외솔 선생은 우리 겨레를 사랑하는 길은 입이나 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몸과 행동으로 실천해야 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1926년 외솔 선생은 영원히 남을 ‘조선 민족 갱생의 도(朝鮮民族更生의 道)’를 썼다.

<이성태 외솔회 울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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