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솔 이야기 ①> 나라 구하는 길과 ‘조선민족 갱생의 길’
<외솔 이야기 ①> 나라 구하는 길과 ‘조선민족 갱생의 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9.02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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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10월 9일 한글날을 앞두고 울산이 낳은 위대한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외솔 최현배 선생의 발자취를 이성태 외솔회 울산회장의 글을 통해 더듬어 보기로 한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연재되는 글은 지난 8월 28일 울산현대호텔에서 전국 국어책임관·국어문화원 공동연수회에서 가진 이성태 회장의 특별강연 ‘나라사랑으로 겨레의 얼을 일깨운 외솔 최현배 선생’의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편집자 주>

Ⅰ. 머리말

사람들은 자신의 행적에 대해 크든 작든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오래도록 남겨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 스스로의 삶에 남긴 가치에 따라 평가될 뿐이다.

지금도 외솔 최현배 선생의 얼은 때와 곳을 넘어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그의 모든 삶은 위대한 우리 말·글 연구뿐만 아니라, 나라를 되찾기 위한 고만의 삶으로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나라와 겨레의 이름으로 더욱더 찬연히 그 빛을 더할 뿐이다.

또한 우리는 말과 글을 가졌기 때문에 문화겨레이다. 하지만, 우리의 말과 글은 나라 안팎에서 역사적 운명을 함께하며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말·글은 뒤로하고 다른 나라의 말과 글을 무분별하게 쓰는 풍조가 가시지 않아 안타깝기 짝이 없다.

우리 말·글은 훌륭한 우리 선각자들의 한결같은 노력으로 나라의 운명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지금까지 당당히 겨레문화 창조의 노릇을 충실히 해오고 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은 훈민정음 역사 이래 침체되고 병약한 국민정신 문화의 위기를 극복하고 쓰러져 가는 겨레의 얼을 되살리기 위해 우리의 얼이 담긴 말과 글을 연구하고, 지키고, 다듬고, 이를 나라 안팎으로 널리 펴는 일에 언제나 앞장섰고 갖은 정성을 다 쏟았다.

특히 광복 70년과 함께 우리 말과 글을 지켜내고 나라사랑, 겨레사랑을 함께하며 우리 민족의 ‘다시 일으켜 세움’(=갱생)을 위해 한 삶을 다 바친 외솔 최현배 선생의 자취를 좀 더 알고자 외솔회가 펴낸 ‘나라사랑’ 1집, ‘조선 민족 갱생의 도’, ‘나라사랑의 길’을 바탕으로 고영근, 김석득, 허 웅 교수님이 지으신 ‘최현배 선생’과 장원동 교수의 ‘최현배의 교육철학’, 그리고 설성경 교수의 특강 ‘외솔 정신을 계승한 애제자 윤동주’를 함께 정리하면서 되돌아보기로 한다.

Ⅱ. 나라 구하는 길과 ‘조선민족 갱생의 길’

1. 배움의 시작과 시대적 상황

외솔 선생은 갑오개혁이 일어나던 해인 1894년 울산시 중구 동동에서 최병수 님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당시의 조선은 고종의 ‘교육입국 조서’에 따라 새 교육기관인 학교가 설립되고 이어 ‘소학교령’, ‘중학교령’이 발표되면서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자각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또 고종이 법률 명령을 한글로 쓰게 하자 뒤이어 한글로 쓰인 ‘독립신문’이 발간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은 순 한글만으로 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신문이었다.

이 ‘독립신문’은 우리의 말과 글에 대해 처음으로 자주적인 인식을 표방했다고 보이며 스스로에 의한 민주·자주·독립의 선언이기도 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사상적 대혁명이자 혁명의 도도한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외솔 최현배 선생이 태어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외솔 선생은 어려서 동네 서당에 처음 들어가 한문을 배우면서 서당의 교육방법이 형식적인데다 단순히 외우기와 읽기에 치우친다는 사실에 실망하고 비판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판의식은 새로운 교육을 배워야겠다는 자각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다.

외솔 선생은 그가 지은 ‘나의 걸어온 학문의 길’에서 서당의 교육방법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서당 교육이 우리 겨레의 창의력, 독립성, 자주성을 기르는 데 매우 큰 장애요인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선생이 쓴 글에 의하면 외솔 선생은 서당 교육을 마치고 나이 14살 되던 해, 때마침 신식교육기관인 일신학교(병영초등학교의 전신)에 들어가 새로운 교육과정에 따라 3년간 신식교육을 받았다. 특히 외솔 선생은 수리와 논리적 사고 과정, 스스로 공부하는 태도와 방법을 익혀 일생 동안 자신의 학문연구의 근본으로 삼고 스스로 배우면서도 가끔 또래친구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외솔 선생은 그의 글에서 “1910년 일신학교를 마친 뒤 고향 선배들의 지도를 받고 서울에 올라가 관립 한성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그 해 한일합병으로 일제는 학교 이름도 경성보통고등학교로 바꾸고 우리나라 사람이 지은 모든 교과서를 모두 몰수한 후 일본식의 새로운 교육과정에 따라 공부를 하게 되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성태 외솔회 울산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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