光復
光復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8.12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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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光復).

‘빛을 되찾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말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투쟁을 일컫는 말이 됐다. 그래서 나라를 다시 찾은 날을 광복절이라고 한다.

‘광복’이라는 말은 울산 출신의 독립운동가 고헌 박상진(固軒 朴尙鎭, 1884∼1921) 의사가 1915년 결성한 비밀결사체를 광복회라고 명명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헌은 비록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국했지만 그의 독립투쟁 노선은 일제강점기 여러 형태로 전개된 독립투쟁의 근간이 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들 만큼 치열했다.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여긴 지사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일제에 나라를 내주는 과정을 살펴보면 무기력하기가 짝이 없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였다. 을사늑약(1905)에 앞서 고종과 이토는 자주 대면한다. 그러나 당시 대화 내용에 관한 자료가 우리 측에는 없다. 고종실록에도 만났다는 기록만 있고 대화내용은 없다. 기록은 일본에만 있다. 주로 이토의 복명서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이토는 고종과의 첫 만남에서 고종의 환심을 사는데 성공한다. 고종은 이 때 이토에게 훈장까지 하사한다. 이토는 병탄야욕을 숨기는 데 성공했고 고종은 이토의 흉악한 발톱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토는 예정된 수순으로 병탄 작업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고종을 강제퇴위시키기까지 했다. 고종은 속수무책이었다. 마침내 대한제국은 종말을 맞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일제를 용납할 수 없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 의병 중장 자격으로 그런 이토를 처단했다.

나라 잃은 백성들은 그런 황제들이 붕어했을 때는 성심을 다해 조의를 표했다. 하지만 황제들에 대한 기대는 저버렸다.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3·1독립운동 이후에 세워진 임시정부는 국호를 대한민국이라고 정했다. 제국(帝國)이 민국(民國)으로 바뀐 것이다.

광복 이후에 수많은 정파가 출현했다. 그러나 구황실을 옹립한 군주제를 표방한 정파는 없었다. 이미 민심은 황실과 멀어진 것이다. 당시 황실의 적통은 영친왕이었다. 영친왕도 귀국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친왕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병을 얻게 돼서야 귀국했다. 그것이 1963년이었다. 그리고 7년 동안 병상만 지키다 사망했다.

백성들은 일제의 강점을 어둠으로 여겼다. 그리고 빛을 찾기 위한 투쟁에 나섰다. 그 선봉에 고헌이 섰던 것이다.

일본은 명치유신을 단행하며 체제개혁을 이뤘다. 일본은 유신 이후 구질서를 혁파하고 나라의 밑그림을 그려 나갔다. 이때 대두된 것이 정한론(征韓論)이었다. 한반도를 정벌하자는 주장이다. 명치유신의 3걸로 불리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주창했다. 사이고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정한론이 무산된 것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는 연기된 것에 불과했다. 연기된 정한론을 실행에 옮긴 자가 이토이다.

이보다 약 300년 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천하를 통일하자마자 조선으로 군사를 보냈다.

일본은 힘이 모아지면 어김없이 한반도로 눈을 돌렸다. 정한론이 지금은 완전히 소멸했다고 볼 수 없다. 정한론은 예의 바르고 상냥해 보이는 일본인들의 심중에 숨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국민의 역량을 집결시키지 못하면 또 당할 수 있다.

<강귀일취재2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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