괘릉(掛陵) 이야기
괘릉(掛陵)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7.2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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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중순의 무더위가 아침부터 동네 노인들이 노송 아래에 자리를 깔게 만든다. 파랑새 한 마리가 키 큰 늙은 소나무 수동(樹洞)에서 고개를 내밀고 이리저리 살핀다. 간간이 꾀꼬리 소리가 들린다.

파랑새 한마리가 노송 위를 ‘캑캑’거리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것은 꾀꼬리 때문일 것이다. 파랑새는 자기의 활동영역 안으로 들어오는 다른 새들을 경계하는 습성이 있어서다. 멀리 큰부리까마귀가 울면서 날아간다. 오색딱따구리는 까치가 방해하자 노송을 안고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한다. 이따금 땅에 내려앉았다가도 까치의 간섭이 계속되자 숲속으로 날아가 버린다. 까치 다섯 마리가 온통 개망초로 뒤덮인 능에서 먹이를 쫀다.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번지에 있는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능을 두가지 목적에서 찾았다. 하나는 석조물과 12지상을 보기 위함이다. 나머지 하나는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의 연유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원성왕은 신라 제38대 왕으로 살아서는 김경신(金敬信)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원성이라는 이름은 죽고 나서 불린 이름이다. “798년(재위 14년) 12월 29일 왕이 돌아가니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명(遺命)에 의하여 영구를 봉덕사(奉德寺) 남쪽에 불태웠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조의 기록이다.

괘릉의 석조물은 능 입구로부터 화표석, 무인상, 문인상 각각 한쌍이 양쪽에서 마주보게, 그리고 마지막의 산예상은 두쌍으로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이러한 석조물의 궁극적 의미는 벽사(闢邪)와 수호(守護)에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왕릉의 석조물은 맹수와 뿔이 난 짐승을 배치하며 사람의 형상인 경우 사천왕상, 금강역사상처럼 주먹을 불끈 쥔 석조물 형태로 나타난다. 벽사와 수호는 용감하며 무서워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괘릉의 무인상을 서역인(西域人)으로 보는 것도 동양인보다 신체가 커 무인상 혹은 벽사인과 같은 조각상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12지상은 12종류의 짐승을 말하는데 원원사탑, 태화사지 부도, 김유신 묘 등지에서 볼 수 있다. 능을 찾다 보면 화표석으로부터 능에 이르기까지 무인, 문인, 양, 산예 등 다양한 종류의 석상물이 한쌍씩 마주보게 배치되어 길게 세워져 있다. 이러한 석조물은 일종의 ‘능 지킴이’ 역할을 한다. 조선시대의 능참봉은 왕의 능을 지키는 소임자이다. 소임자는 사람에 국한된 것은 아니며 석상도 능을 지킨다.

이는 상여 앞에 나서는 방상씨(方相氏), 요령(搖鈴), 선소리, 타고(打鼓)와 지신밟기 포수(砲手) 등의 역할과 유사한 것이다.

괘릉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찾을 수 없다. “별칭으로 ‘괘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을 걸어 묻었다는 조선시대 민간신앙이 결부된 전설에 따른 것이다”라는 현장의 안내문구가 오히려 관심을 갖게 한다.

삼국통일을 한 문무왕은 화장하여 능이 없는 반면 원성왕은 유명에 의해 화장을 했는데도 물구덩이에 묘를 쓴 전설을 간직한 채 괘릉으로 남아있는 것이 특이하다.

김경신은 살아서 꿈에 천관정에 들고, 북천의 물 때문에 왕이 되며, 수리시설인 벽골제를 확대하는 등 물과 관계된 일이 적지 않았다. 치수(治水)사업의 치적을 부각시키기 위해 죽어서까지 곡사(鵠寺)에 장지를 선택하여 후대에 이르러 이야기가 된 것으로 짐작된다. 전적에 기록이 없는 구전(口傳)되는 전설이지만 기록보다 오히려 더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미루어 짐직해보는 유추의 묘미가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곡사를 옮기고 그곳에 능을 만들었을까.

원성왕의 능침은 모화로부터 이어진 주변의 넓은 농경지에서 과거에 따오기가 많이 관찰된 것으로 미루어 습지였을 거라고 상상이 된다. 고니는 ‘백조’로 부르는 반면 따오기는 ‘곡’으로 기록되고 있다. ‘곡(鵠)’자는 고니, 따오기 같은 물새로도 해석할 수 있지만 정곡(正鵠)이라 하여 과녁을 뜻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곡은 깨달음이요 정직함이다[鵠者覺也直也 <詩經·注>]란 말을 새겨볼 때 원성왕은 보은사를 창건하는 등 불교와의 연관성도 놓칠 수 없는 부분이라 하겠다.

세속에서는 묘를 쓰고 난 뒤 관이 물에 잠기면 후손에게 좋지 않은 영향이 미친다 하여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경우는 있으나 처음부터 작정하고 물구덩이에 관을 넣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괘(掛)는 걸 괘, 작괘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용가(龍架)와 현관(懸棺)같이 ‘건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 불가에서 ‘괘(掛)’는 ‘걸다’와 ‘들다[入]’의 두가지 의미로 쓰인다. 용례를 보면 먼저 ‘걸다’의 경우 괘불대에 불화를 높이 거는 괘불(掛佛) 혹은 술 뜨는 곡자를 말하는 작괘 등이 있다. ‘들다’의 경우 괘선(掛禪), 괘탑(掛塔), 괘보살(掛菩薩) 등으로 쓰인다.

이러한 관점에서 ‘괘릉’이라는 별칭은 원성왕이 생전에 관심을 두고 실천한 치수와 불교를 함께 부각시킬 의도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괘릉 앞을 흐르는 작은 지천은 울산 지경을 지나면서 점차 확장되어 태화강과 합수되어 동해로 흘러드는 동천의 발원지가 되기도 하다.

<김성수 조류생태학박사·울산학춤보존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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