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아 승려 이동인
풍운아 승려 이동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7.19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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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길부 국회의원이 양산 통도사의 산내암자 ‘자장암’을 찾은 것은 한 달 전쯤이다. 자장암 ‘감원(監園)’으로서 수도정진에 바쁠 현문 스님(전 통도사 주지)을 어렵사리 만나러 간 것이다. 자장암이라면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와 금개구리(金蛙) 전설로 유명한 암자다. ‘유감스럽게도 ‘금와보살’만큼은 아니라 해도 꽤나 소중한 유물의 존재를 애써 떠올리는 이는 드물다. 구한말 큰 바위를 쪼아 조성한 ‘마애불상’이 그것이다.

‘큰스님은 마애석불이 새겨지는 데는 울산의 큰 부자 김홍조 옹의 도움이 컸다고 합디다.” 김 옹의 통 큰 기부는 이름 석 자와 함께 조각돌에 오롯이 남아 있다. 현문 스님의 귀띔에 흥미로운 사실이 또 하나 있었다고 했다. 구한말 개항기에 혜성같이 중앙정치무대에 나타났다가 홀연히 사라진 ‘이동인(李東仁)’이란 인물의 존재다. 강 의원은 사극계(史劇界)의 산 증인 신봉승 작가의 텔레비전 대담을 시청하던 도중 이동인의 성씨가 ‘학성 이씨(=울산 이씨)’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신봉승이라면 역사소설 ‘이동인의 나라’의 지은이다. “학성 이씨라면 혹 울산 사람은 아닐까?” 시원스러운 답은 현문 스님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기록을 살펴보기로 했다. 인터넷 기록을 추적했다. 이동인에게는 은근히 꼬리표가 많았다. ‘승려’ ‘정치가’ ‘개화기의 풍운아’에다 ‘개화승(開化僧)’ ‘개화론자’ ‘급진개화파’까지 참 다양했다. 이동인은 사실 승려 출신이니 ‘승려’란 꼬리표는 틀리지 않다. 처음엔 부산 동래 범어사 승적을 가졌다가 나중엔 서울 서대문 봉은사(태고종 본사) 승적도 거친다. 지금이야 조계종, 태고종, 천태종 등으로 가르지만 구한말만 해도 모두가 ‘조선불교’ 테두리 속에서 하나였다. 기록에 따르면 이동인은 1881년(고종 18년) 3월 갑자기 이승에서 사라진다. ‘암살’ 설이 주류 학설이다. ‘비담’이란 필자가 ‘이동인의 총포와 군함’이란 글에서 서술한 대목이 특히 눈길을 끈다. “그는 한의사 유홍기(1831~?)를 만나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 발전상에 관심을 갖고 부산을 거쳐 밀항, 처음 시찰에 나선 개화파의 선구자다.… 그는 첫 외국영사관인 서대문 밖 일본의 ‘청수관’을 찾아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를 접촉하며 일본어를 배웠다.” 비담은 밀항 시기를 1879년(고종 16년) 6월, 도움 준 이를 유대치·김옥균 등 ‘개화당 요인’으로 꼽는다.

이동인은 이후 교토의 혼간사(本願寺)에서 10개월간 머물면서 변모된 일본사회를 살핀다. 다시 도쿄로 가서 일본 조야(朝野) 정치가와 접촉하던 무렵 수신사(修信使) 김홍집과 사귀게 된다. 밀항 이듬해(1880년) 9월, 김홍집을 따라 귀국한 그는 김홍집의 소개로 당시 실세 민영익(명성황후의 친정조카)을 알게 된다. 민영익의 사랑방에서 묵던 그는 민영익의 주선으로 고종을 만나 일본의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알려 고종의 총애까지 받는다. 1881년 3월에는 통리기무아문 참모관 자격으로 총포·군함 구입 임무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갈 예정이었으나 출발 직전 갑자기 사라지고 만다. 암살 주체를 두고 명성황후 일파라는 설, 청나라 자객이라는 설, 양반 수구파라는 설 등등 그의 죽음을 둘러싼 추론은 여전히 분분하다.

비담은 이동인을 가리켜 “반상(班常) 구분 없는 평등한 이상사회를 꿈꾸었고, 신식무기로 무장한 근대화된 조선을 갈망했다”고 적었다. 강길부 의원 역시 아까운 인물이라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한다. 그러나 강 의원은 할 일이 태산 같은 정치인이다. 그렇다면 누가 ‘학성 이씨 이동인’의 일대기를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재구성해줄 수 있을 것인가.

반가운 소식은 있다. 통도사 산내암자 ‘서운암’의 감원 성파 스님이 연내 개최를 목표로 ‘풍운아 승려 이동인’을 주제로 한 학술세미나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이다.

<김정주논설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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