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도(蓼島)와 정몽주 ①
요도(蓼島)와 정몽주 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3.24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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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蓼島(요도)의 위치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 시를 노래한 고려 말의 충신 포은 정몽주가 유배 온 언양(彦陽)에 섬이 있다는 말을 들어 보셨나요? 언양에 무슨 섬이냐구요? 하하 요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여뀌 ‘蓼’자에 섬 ‘島’자. 그럼 어디에 있어요? 막상 귀양을 온 정몽주도 요도의 위치가 어디인지 몰라 먼저 바닷가의 섬부터 찾았다고 하네요.

옛 문헌에서 한번 찾아볼까요.

요도는 ‘언양읍지’(1919년) 도서조(島嶼條)에 의하면, “언양현에서 일리 떨어진 어음리에 있고 보통원 아래 밭 기슭 가운데 하나의 작은 언덕으로서 이수간(二水間)에 있기에 그렇게 부른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在縣一里於音里普通院下 田麓中一培 也二水間故也)

또한 헌양잡기[山獻陽雜記]에 의하면 “요도는 언양 고을 동쪽 1리(400m)인 보통원 아래에 있으며 중간 중간에 밭이 있는 나지막한 구릉지이다. 삼면이 물로 접해 있어 이름을 요도라 하였다. 유배 온 죄인 12명이 늘 사는 곳으로 혹시 이들이 민폐라도 끼칠까봐 매달 초 쌀 3말을 주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在縣東一里 普通院下 卽田麓間一小丘也 處三水間故爲名 定式流配罪人 十二而每人給 朔米三斗 後或俉給貽民弊)

읍지에서 요도를 도서조(島嶼條)에서 언급한 것을 보면 비록 작은 하중도(河中島)이지만 섬으로 본 것으로 보이며, ‘이수간’이나 ‘삼수간’이란 말에서 유추해 볼 때 한 때는 언양 앞을 흐르는 남천과 고헌산에서 내려오는 감천 사이에 샛강이 연결되어 마치 요도가 삼각주와 같은 섬의 형태를 갖추었던 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같이 하중도가 적소가 된 곳은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세종의 12째 아들 한남군이 한때 위리안치(圍離安置)되었던 지리산에 인접한 함양군 휴천면 한남마을의 ‘새우섬’이 바로 강 가운데 있는 하중도입니다. (※위리안치(圍離安置)= 유배지에서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둘러쳐서 죄인을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 그리고 여뀌 蓼(요)자와 섬 島(도)자를 쓴 것을 보면 삼면이 온통 물가라 섬 주변에 습지식물인 여뀌가 많이 살았을 것으로 보이며, 어떤 이는 요도에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고도 말합니다.

‘보통원’이란 옛날 나라에서 역(驛)과 역 사이에 두어 지방으로 출장 온 관원(官員) 등을 유숙(留宿)시키던 여관이며, 남천과 감천의 합류지점에 요도가 있었다면 정몽주가 유배 온 적소는 지금의 어음상리 마흘(馬屹)부락입니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헌양잡기(山獻 陽雜記)라는 책에 요도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 책이 실제로 존재했을까요? 그렇다면 언제쯤 누가 발간한 책일까요? 1916년에 발간된 언양읍지의 이름 ‘헌산지(山獻山誌)’와 1800년대 초부터 발간된 언양읍지를 아울러 헌양잡기라고 불렀을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오늘날 고헌산을 한자로는 ‘高獻山’으로 표기하고 1759년에 편찬된 「헌산여지승람」 초고본도에는 언양의 진산으로서 뚜렷이 ‘高山獻山’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언양을 신라시대에는 한때 ‘헌양’으로 부른 적이 있어 언양은 고헌산 아래 양지바른 마을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지역에 선비가 많이 나 선비 언(彦)자를 써 선비의 고장 언양(彦陽)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밭 기슭(田麓), 작은 언덕(小丘), 마구간이 있는 솟아 있는 산(馬屹) 등의 낱말로 보면 요도의 모습은 섬처럼 보이면서도 작은 언덕 즉 구릉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몇 번을 찾아가 지형을 살펴보아도 지금은 구릉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언양 지역에 경지정리를 하면서 작은 언덕이 평지로 바뀐 것으로 보입니다.

<조상제 강북교육지원청 교수학습지원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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