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의 시대
웰다잉의 시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1.08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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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며 살고 있다. 16년 전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자 홀로 남은 어머니는 울산에서 외롭게 지내셨다. 너무 심하게 닳아버린 무릎 관절 때문에 거동의 큰 불편을 겪으면서도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겠노라 처음에는 상경(上京)을 거부하셨다. 그러나 그 고통의 세월이 10여 년 더 흐르면서 어머니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마침내 어머니는 상경을 결심, 아들 곁으로 오신 지가 어느덧 4년째로 접어든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낯선 서울 생활에 적응하시느라 다소 어려움도 겪으셨다. 그러나 본디 낙천적인 성격을 지니신 터라 아파트 노인정을 오가며 새로운 벗들과의 친교도 무리 없이 잘 꾸려 나가고 계신다. 우려(憂慮)가 기우(杞憂)로 바뀌었으므로 필자는 다행스럽다는 생각과 함께 고마움에 젖기도 한다.

갈수록 힘들어지는 보행에 많은 어려움이 따르긴 하나 그 외에는 특별한 질환이 없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른 아침,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올린 뒤 출근 준비로 바쁜 와중에도 필자의 신경은 온통 어머니의 침소 쪽으로 쏠린다. 간밤에 숙면은 취하셨는지, 혹시 잠이 깨신 다음 평소와 다른 특별한 증상은 없으신지, 어머니 곁으로 다시 조용히 다가가 살피게 되는 것이다.

86세의 고령이라는 점이 늘 필자의 머릿속을 떠돌고 있으므로 날마다 어머니의 건강상태를 살피는 일은 일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요즘 들어 조문하는 일이 부쩍 늘었다. 이제 필자의 나이도 환갑에 가까워지니 동창이나 지인들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자주 접하게 된다.

자연의 섭리요 하늘이 하시는 일이지만 슬픔에 잠긴 유족의 입장에서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조문을 마치고 나면 유족과 주로 나누는 대화가 돌아가신 분에 대한 투병과정과 기간, 그리고 임종 때의 상황 등이다.

이때 주된 관심사는 투병기간이다. 높은 연세에 몇 주 정도 앓다 가셨다고 하면 다행스럽다는 표정을 짓기도 하지만 치매나 악성 질환으로 오랜 기간 투병 끝에 고통스럽게 가셨다고 하면 무거운 마음을 가눌 길 없다.

생로병사(生老病死).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나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임에도 필자는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부터 이 네 글자가 담고 있는 불변의 진리 앞에 더욱 절실한 심정에 놓이게 되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인생의 마무리 즉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에 대한 상념 또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한동안 우리 사회에선 잘 먹고 잘 살자는 ‘웰빙’이 유행했다. 그러더니 이제는 인생을 품위 있게 마무리하기 위한 ‘웰다잉’이 새로운 화두로 떠올랐다. 모든 사람은 존엄하고 평화롭게 죽을 권리가 있지만 실상 그렇게 죽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100세를 넘긴 뒤 곡기(穀氣)를 끊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미국 경제학자 스콧 니어링이나 고승대덕(高僧大德)들에 버금가는 죽음을 맞기란 그리 쉽지 않다. 니어링처럼 현명함과 지혜를 가진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준비가 없으면 실현이 어렵다.

이처럼 웰다잉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게다가 기대수명은 갈수록 늘고 있다. 베이비붐 세대가 노령화 되었을 때 노인인구는 더욱더 늘어나고 기대수명 또한 더 늘어날 것이다.

오래 살면서 건강하게 살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을 경우, 오래 사는 것 자체가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의식불명인 상태로 죽음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의식이 또렷한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는 어쩌면 자신의 생활습관이나 마음 다스리기에 달린 것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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