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부성(父性)을 생각하며
진정한 부성(父性)을 생각하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5.01.07 20: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좋은 아버지의 나쁜 행동’이라는 칼럼을 읽었다. 아버지가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이나 어두운 면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행동하지만 그것이 은연중에 자칫 자식에게는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내용이었다. 일련의 내용을 읽고 필자도 지난날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좋은 아빠의 역할을 한답시고 아이의 ‘존재(存在)’를 혹시 ‘소유(所有)’로 착각한적은 없었는지 자성(自省)해 봤다.

연말연시 극장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이 연일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때 맞춰 영화 내용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내용을 두고 이념 운운하고 있다. ‘아버지께 드리는 헌사’라는 연출자의 말처럼 이 영화는 굴곡진 우리의 현대사를 살아온 ‘아버지’의 힘들고 고달픈 모습을 그렸을 뿐 영화의 메시지는 이념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참혹한 전쟁에서 비롯된 어린 소년의 기구한 운명과 배고프고 굶주림 속에서도 가족을 보살피라고 당부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고 가시밭길 같은 삶의 여정을 헤쳐 나가는 소년의 모습에서 관객들은 누구나 한번쯤 눈시울을 붉혔을 것이다. 장년 이상의 관객들에게는 영화 속 주인공의 삶이 자신이 살아온 과정과 비슷하다고 느껴서 이거나 어른이 된 뒤 돌이켜 본 아버지의 삶의 모습과 중첩된다고 생각해서 일 것이다.

필자에게도 그와 비슷한 기억이 있다. 필자의 부친은 일제 강점 직후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어려워 젊어서 일본으로 돈 벌러 갔다 와 결혼을 하고 8남매를 뒷바라지 하셨다. 필자는 어린 시절 들에서 일하시는 아버지에게 ‘새참’ 심부름을 자주했다.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가다 목이 마르면 호기심에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살짝 몇 모금을 마셨는데 아버지는 용케도 이를 아셨다. 어느 해 이른 장마로 논바닥에 베어 늘어놓은 보리가 물에 잠기자 온종일 혼자서 지게로 옆 산등성이로 저다 나르는 걸 곁에서 지켜본 적이 있다.

지금도 빗속에서 혼자 지게를 지고 수십 번 논과 산등성이를 오르내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아버지는 8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학교에 보내셨다. 이런 일이 비단 필자의 아버지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는가.

서정주 시인은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애비는 종(從)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아버지는 신분으로서의 ‘종’이 아니었다. 가난하게 살아야 했던 어려운 시절 아버지들은 대부분 ‘종’이었다. 그 시절 식솔들의 생존문제와 자식들 뒷바라지를 위해 겪어야했던 아버지들의 고달픈 삶은 ‘종 살이’ 그 자체였다. 그 시절 아버지들은 살아 온 그 모습 자체로 자식들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셨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부성(父性)의 발로(發露)였다.

그런데 최근 아버지들이 자식을 위한다면서 자식의 ‘존재(存在)’를 ‘소유(所有)’로 오해하거나 혹은 물질적 유산(遺産)을 조금이라도 더 물려주는 것을 부성(父性)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종길 시인의 ‘성탄제(聖誕祭)’에서처럼 사그라져가는 아이의 목숨을 위해 눈 속을 헤치고 다니며 산수유 열매를 따오던 ‘아버지의 서늘한 옷자락’을 자식들이 느끼고, ‘아버지가 눈 속에서 따오신 산수유 알알이 내 혈액에 녹아 흐르는 것’이 진정한 부성(父性)임을 알게 되는 것은 언제쯤 일까.

김홍길 신언중학교장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