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회-12. 칼은 살아서 말한다(5)
128회-12. 칼은 살아서 말한다(5)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2.03 21: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옥전에 다시 가을이 왔다. 옥전의 가을은 늘 그렇게 억새꽃 군무 속에서 찾아왔다. 억새꽃은 쓸쓸하다. 스스로를 꽃잎으로 산화하며 바람과 함께 가기 때문이다. 선영의 그 언저리에서 황강을 따라 그 수백 리를 억새꽃은 줄지어 서서 바람에 몸을 섞으며 가을 속으로 산화되고 있었다.

진수라니는 홀로 궁성을 나와 말을 타고 오곡을 거두어들이는 가을 들녘을 지나 여기까지 말을 몰아 달려왔다. 바람에 몸을 맡긴 억새꽃의 휘날림이 애처롭고 쓸쓸했다.

아직 신라의 적들은 오지 않았다. 가라를 불바다로 만들고 5천여 명의 포로를 끌고 군졸들이 물러가고 난 뒤 강 건너에서 어떤 기별도 아직 오지 않았다. 투항하라는 김무력의 서계에 동생을 죽여 그 결의를 보여 주었기 때문에, 신라는 더 이상 진수라니 국왕에게 어떤 투항을 권유하는 어떤 문건도 보내지 않았다.

신라는 다라국의 뜻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다라의 그 방대한 화살과 칼의 위력을 알고 있을 것이기에 섣불리 달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야 연맹의 열한 개 나라가 다 쓰러지고 홀로 남은 이 가을의 외로움을, 한 나라가 겪는 외로움을 그 나라의 국왕인 진수라니는 뼈저리게 느꼈다.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외로움은 견딜 수 있는 것이지만 한 나라가 고립된 채 겪는 외로움은 견디기 힘들었다.

가야의 제국들과 분주하게 오고가는 서계들, 연락 관리가 수시로 드나들던 궁성엔 발길이 뚝 끊어졌다. 다만 가라에 전란이 있고 나서 남부여의 사자가 궁성으로 진수라니 국왕을 만나서 홀로 남은 다라를 위해, 신라의 내침이 있을 시 병력을 보내 주겠다는 말을 하고 간 일은 있었지만 궁성을 찾아오는 외부의 발길이 끊겼다. 철정을 구입하러 오던 왜국의 교역자들도 전란의 위험을 두려워하기 때문인지 오지 않았다.

산천은 붉게 타고 고을마다 과일들이 발갛게 익어가고 있었지만 진수라니 왕의 마음에 가을이 그리 아늑하지는 않았다. 아름다운 그 가을의 정취 속에 마치 태풍전야의 고요 같은 불안이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언젠가는 백척간두에서 맞서야 하는 불안들에 대한 마음의 단서가 켜켜이 가을 잎 속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국왕은 그러한 생각이들 때마다 그 마음의 그늘을, 그 미끄러운 불안의 단서를 갈기갈기 씹으며 산과 들을 헤매고 다녔다.

백 일이면 된다고 했던 그의 말, 백일이면 어떠한 적도 막을 수 있는 대비를 할 수 있다고 대신들에게 했던 자신의 말을 국왕은 스스로 떠올리며 군영의 군기고와 성첩, 그리고 야철지를 찾아 나섰다. 변경이 어수선하면 민심이 동요하고 백성은 본분을 망각하기 일쑤란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장들 중에서도 적과 내통하며 기회만 엿보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었다.

투항하기 전 진파라 하한기를 따르던 군장들이 진파라가 투항하고, 그리고 끝내 죽음을 맞자 나라에 반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미 상수위와 이수위가 파악해서 고한 바가 있었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