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을 반추(反芻)하며
지난 가을을 반추(反芻)하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2.03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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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이긴 하지만 따스했던 어느 주말 오후, 컴퓨터 작업이 더딘지라 답답해 학교 정원을 거닐고 있는데 한 소녀가 저만치서 혼자 춤 연습에 빠져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학교 울타리 너머 마을에 사는 우리 학교 여학생이었습니다. 평소 이름을 알고 있는 터라 말을 걸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소녀와 필자는 노랗게 익어 가는 모과며, 가으내 알몸으로 붉은 열매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산수유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진 은행잎들을 주워 차곡차곡 꽃송이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 학생이 전화를 받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사도 없이 쏜살같이 달려가 버렸습니다. 아마 친구의 생일잔치가 급했던 모양입니다.

발걸음을 옮겨 채전(菜田)으로 향했습니다. 늦게 심고 척박한 땅인데도 배추가 제법 속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무는 아이 머리만 한 정도로 제법 실하게 자랐습니다. 거센 바람에 간간이 무청이 부러져 안타깝긴 했지만 시금치 싹이 돋아 자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안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울타리 앞에 있는 단풍나무를 바라봤습니다. 진홍빛을 자랑하는가 하면, 노란 빛, 아직도 녹색으로 남은 나뭇잎 등 각양각색이었습니다. 몇몇 가지를 꺾어 페트병에 물을 담고 꽂아서 가을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우선 보기에 화사한 빛깔이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네 인생사도 마무리가 이렇게 화사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꽂아둔 나뭇잎이 약간은 기세가 꺾인 듯했지만 눈을 사로잡는 맵시는 여전히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저녁 무렵이 되자 믿기지 않을 만큼 그 곱던 빛깔은 온데간데없고 풀 죽은 모양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리도 쉬 시든단 말인가’ 안타까운 탄식이 저도 모르게 새어 나왔습니다. 마침 그 곁에 뒤뜰에서 가져 온 국화꽃 몇 송이가 병에 꽂혀 있었고, 정원에서 주워온 노란 모과가 몇 알 놓여 있었는데 그들은 어제와 별반 다른 게 없이 여전한 모습이었습니다. 종류는 다를지언정 제 본래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은 마찬가지인데 이토록 다를까 싶었습니다.

아, 그랬었나 봅니다. 모든 나무들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뿌리로부터 줄기가 나고, 줄기에서 작은 가지가 나고, 가지 끝에서 잎사귀가 돋고, 그것들이 힘들여 꽃을 피우고, 그 꽃은 열매로 혹은 씨앗으로 맺어지는 법이지요.(아시다시피 더러 꽃부터 피는 놈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제 몸을 떠나고 보니 가지로부터 먼저 돋은 잎은 나중에 피는 꽃보다 먼저 시들고, 먼저 핀 꽃은 나중에 맺는 열매보다 먼저 시들고, 열매는 나중에 맺지만 가장 나중에 시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매는 뿌리에서 가장 멀리, 가장 나중에 맺지만 어쩌면 뿌리와 가장 가까운 것, 머잖아 새로운 뿌리로 돌아가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화려한 단풍은 순간 우리의 눈을 현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그 순간이 지나면 그 뿐인 듯합니다. 꽃 또한 향기와 빛깔로 우리를 즐겁게 합니다만 열매 맺지 못할 꽃이라면 그 의미는 반감되겠지요.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이 단풍잎이나 꽃처럼 화사하게 마무리 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저 열매처럼 새로운 뿌리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 열매나 씨앗은 모진 겨울을 인내하고 나면 새로운 줄기나 가지를 자라게 하고 잎과 꽃을 피우고, 마침내 또 다른 새 열매를 맺어줄 든든한 뿌리가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마무리도 부디 열매를 맺어 새로운 뿌리가 될 수 있기를 진정으로 소망해 봅니다.

<김홍길 신언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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