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회-12. 칼은 살아서 말한다(4)
127회-12. 칼은 살아서 말한다(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2.02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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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명이 넘는 남녀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왕은 아우인 탈지이질금을 신라에 인질로 보내고 왕자와 장손 졸지공을 신라에 보내어 항복을 구하려한다고 합니다.”

“아라국을 삼킨 지 일 년이 안 되어 기어이 가야국의 맹주인 가라국마저 삼켰구나.”

진수라니왕의 말은 뼈아픈 말이었다. 왕으로서의 절망이 그대로 묻어나는 말이었다. 아라와 가라는 다라국에 외성과 같은 나라였다. 아라는 서남쪽에서 백제의 진출을 막아주고 가라는 동북쪽으로 신라를 막아주는 외성과 같았다. 그러나 불과 1년 간격으로 두 나라를 다 잃어버린 심정은 마치 맨몸을 드러내고 창칼 앞에 서 있는 것과 같게 느껴졌다. 허전하고 막막했다.

“신라가 아라국을 원정할 때는 소리 없이 이루어졌고, 아라국왕도 크게 저항하지 않아서 쉽게 신라의 영토가 되었습니다만…….”

이수위가 염려스런 표정으로 왕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어떻게 정복되었던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문제는 이제 우리를 막아 줄 완충국이 없다는 것이다.”

진수라니왕의 막막한 심정은 이제 불안함이 뒤섞였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이미 아라국이 신라의 수중에 들어갔을 때 경계를 강화하고 결전의 대비를 해야 했거늘, 어찌 그다지 방비를 소홀히 하였단 말인가?”

진수라니 왕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혼잣말처럼 쓸쓸하게 들렸다.

“도설지왕이나 군장들의 방심 때문이 아니었겠습니까? 신라가 설마 가야국의 맹주인 그들을 공격하겠느냐 하는 방심이 결국 신라를 불러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되옵니다.”

상수위의 말이 다시 조심스러워졌다.

“신라의 젊은 왕이 정벌한 비사벌국(창령)의 산정에 비를 세우고 몇 차례나 그 산정에 올라 낙동장강 너머 망망한 서쪽 땅을 탐내며 군마를 훈련할 때 이미 아라나 가라국의 운명은 결정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겠구나…….”

“그러하옵니다. 가라나 아라는, 남부여(백제)로 인해서 미처 신라를 대비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가야 제국에 미치는 남부여의 국력이 약해지자 신라가 두 나라를 삼켜버린 것이옵니다.”

상수위의 말은 마치 혼자 하는 말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왕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무거운 침묵 속에 왕은 무엇을 생각하는지 고개를 들어 냉랭한 시선으로 정전의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고 앞을 주시하는 왕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돌과 같아 보였다. 마치 문살이라도 차고 나갈 듯 바라보는 시선에 살기가 느껴졌다. 마치 맨손으로 맹수와 맞서는 사람에게서나 볼 수 있는 비장함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상수위는 고개를 숙였고 이수위는 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아마 백 일은 걸릴 거야…….”

왕은 시선을 꼿꼿이 천장에 박은 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백 일이면 충분해, 충분하고도 남을 거야…….”

“전하, 황공하오나, 뭘 말하시는 것이옵니까?”

상수위가 왕의 환상을 깨우듯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이수위와 연락군관도 정색을 하고 왕을 쳐다보았다.

“그들이 바로 올 수는 없어. 그들이 포로를 끌고 서라벌로 가서 다시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적어도 백 일은 걸릴 거야.”

왕은 시선을 거두어 대신들을 바라보았다.

“전하, 무슨 말씀이옵니까?”

상수위가 비통한 어조로 말했다.

“몰라서 묻는 말이냐? 그들이 이 나라를 쳐들어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전하, 차마 그 말씀을 듣기가 너무나 당혹하옵니다.”

이수위의 음성이 바닥에 깔렸다.

“나를 위로하려고 하지 마라. 그런 말을 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 보라. 백 일이면 그들을 막아낼 충분한 대비가 될 것이라고 말해보라. 그리하여 어떠한 적이 와도 물리칠 것이며, 마지막 한 놈까지도 목줄을 끊어놓겠다고 말해보라! 왜 그러지 못하느냐? 왜 그러지 못하느냐 말이다.”

왕의 말이 정전을 울렸다. 마룻바닥에 닿도록 고개를 숙인 대신들의 귀에 왕의 말은 비수처럼 꽂혔다.

“다라는 결코, 이 다라국은 결코, 가라나 아라처럼 허무하게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이기국, 졸마, 고차, 자타국 그리고 산반하국과 결손국, 임래국까지 줄줄이 신라의 창칼 앞에 쓰러졌지만 다라는 다를 것이다. 다라는 다를 것이다. 끝까지 싸울 것이다. 내가 나가서 직접 싸울 것이다. 이사부가 오면 이 나라의 단단한 화살이 그의 목줄을 꿰뚫어 놓을 것이며, 사다함이 오면 이 나라의 칼이 그놈의 몸을 수십 동강을 내놓을 것이다.”

진수라니의 말은 수십 번의 담금질로 연마된 칼날처럼 단단했고 무쇠고로의 불길처럼 뜨거웠다. 대신들은 바닥에 이마를 대고 움직이지 못했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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