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회-11. 사랑은 언젠가 이별이다(9)
122회-11. 사랑은 언젠가 이별이다(9)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1.25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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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고개를 들고 자신을 향해 욕이라도 한다면 참아내기 쉬우련만, 차라리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고 발버둥을 친다면 좋으련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눈물만 흘리는 비(妃)의 모습은 더 견뎌내기 어려웠다.

‘저 눈물, 저 눈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나에 대한 원망일까? 아니면 살려달라는 마지막 애원일까? 아니면 그래도 살려주겠지 하는 희망으로 버텨왔던 그 세월에 대한 허무 때문일까? 바람과 같았던 세월. 아직도 살며시 고개를 돌리면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 소리가, 뜨거운 그 숨소리가 들릴 것 같은데 그 사랑이 싸늘한 칼날이 되어 돌아온 것은 인생의 기구한 운명 때문일 거야. 그래서 저렇게 울고 있을 거야…….’

왕은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난날 함께 했던 수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한 때 뜨거웠던 아내의 몸. 손을 뻗으면 따뜻한 그 살결이 손끝에 와 닿고, 잠을 자다 눈을 뜨면 품속을 파고들던 가냘픈 그 숨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지난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떠올렸다 지우며 마음을 정리했던 그 생각들이 다시 떠올랐다. 비(妃)와의 이승에서 마지막 이별을 준비하며 비로소 얼마나 많은 눈물이 몸 안에 축적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그 눈물들을 비워내며 아내와의 일을 추억했다.

그리고 왕비를 죽여야 하는 그 이유를 하나하나 붓으로 찍어 쓰면서, 수없이 찢었다가 다시 쓰면서 자신을 책망하고 몇 번이나 자신의 비정함에 스스로 몸을 떨었다. 그리고 혼자 말했다.

‘이제 나라의 기운이 심상치 않소. 국가의 존망이 이제 한 판의 전쟁에 걸렸는지도 모르오. 이 나라를 말살시키려 드는 신라와의 한 판 전쟁에 지면 나도 어느 불구덩이에 던져져서 죽음을 맞게 될 거요. 신라와 내통한 당신을 놓아두고 내가 어떻게 신라와 내통한 자를 처벌할 수 있으며, 병사들에게 어떻게 신라와 싸우라 할 수 있겠소. 왕이 솔선해서 신라와 싸우지 않는데 누가 나가서 싸우려 하겠소.

그래서 내가 아우를 죽이지 않았소. 나의 혈육을 내 손으로 죽이는 그 심정은 하늘이 아니면 알지 못할 것이오. 그것은 나라를 위해 내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길이며 나의 운명이었소. 내가 당신을 살려내기 싫어서가 아니라 이 나라를 위기에서 살려내야 하는 것이 나의 책무이기 때문이오.

그대와의 사랑은 황홀했었소. 그대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내가 얻었던 최고의 축복이며 행복이었소. 사랑은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기에 언젠가 이별일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지오. 이 지상에서 얻을 수 가장 황홀했던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의 왕관마저도 버리고 아마 당신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소. 당신을 만나서 나의 젊은 날이 즐거웠소.

그대의 그윽한 눈, 그 뜨거웠던 몸을 어찌 내가 잊을 수 있겠소. 이승에서 하늘이 우리에게 허용한 시간은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시오. 당신을 산성의 동굴 속에 그 오랜 세월을 보내게 하고, 다시 이렇게 보내야만 하는 나의 마음은 분명 나의 마음이 아니오. 부디 저승에서 더 행복하시오…….’

왕은 길게 숨을 토했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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