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소금 이야기
울산 소금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1.12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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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길(silk road)은 원래 무역로로 개척됐다. 하지만 그 비단길은 물류보다는 동서 문명교류의 통로로 더 크게 활용됐다.

오랫동안 비단길의 동쪽 시종점은 중국의 시안(西安)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정수일 문명교류연구소장은 비단길의 동쪽 시종점을 신라의 금성(지금의 경주)까지 연장해냈다.

경주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에 로마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신라에서 만들어진 물잔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이 손잡이가 비단길을 통해 건너온 로마의 문명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경주 외동에 있는 괘릉을 지키는 무인석의 얼굴도 서역인의 모습이다. 신라유적에서는 유리잔도 출토됐다. 제작기법이나 문양이 로마의 것과 닮았다.

길은 사람들이 자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사람들의 왕래는 문명교류를 낳는다.

배성동 시인은 영남알프스 일대의 사라져 가는 옛길들을 25년 동안 더듬었다. 그 길들에 얽혀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배 시인은 그러다가 그 길들이 울산에서 생산된 소금을 밀양이나 청도, 경주 지역으로 나르던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곧바로 울산의 소금 이야기들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울산에서 소금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울산은 통일 이전의 신라에서 최대의 소금산지였다. 태화강과 외항강 하구의 울산만에는 갯벌지대가 잘 발달돼 있었다. 그 갯벌흙은 서해안이나 남해안의 갯벌흙보다 모래 함량이 많아 소금을 생산하기에 더없이 적합했다.

바닷물을 햇볕과 바람에 말려 얻어낸 소금을 천일염이라고 한다. 이 천일염 생산방식이 한반도에 정착한 것은 아직 100년이 채 안 된다. 그 전에는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얻었다. 그것을 자염(煮鹽)이라고 한다. 자염을 만들 때 그냥 바닷물을 끓이지는 않았다. 함수의 염도를 포화상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바닷물을 머금고 있는 갯벌흙을 말려 다시 바닷물에 헹궜다. 운송수단이 발달하기 전에는 소금을 최대한 짜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무게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까지는 수레와 도로가 변변치 못했다. 조선후기 실학자들은 수레를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학자 가운데서도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북학파 중에 박제가(朴齊家)가 있다. 박제가는 그의 대표저서인 ‘북학의(北學議·1778년)’ 첫 머리에서 각종 수레의 제작법과 활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그때까지 소금은 등짐으로 져 날라야 했던 것이다. 낙동강 수운을 활용할 수 있었던 김해 소금과는 다르게 울산 소금은 대부분이 등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금장수들은 영남알프스의 고갯길들을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거리를 줄일 수만 있다면 험로도 마다하지 않았다.

배성동 시인은 울산의 소금이야기를 세상에 꺼냈다. 곧 책으로 엮어낼 것이라고 했다.

근대시기까지도 소금의 생산과 배분은 권력의 몫이었다. 반대로 소금으로 세력을 키운 사람이 권력자로 등극하기도 했다. 울산에서의 소금은 단순히 시인묵객들의 시재로 쓰인데 그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나말여초(羅末麗初) 울산의 실력자였던 박윤웅의 세력 기반도 소금과 크게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배성동 시인이 꺼내든 울산의 소금 이야기는 향토사의 연구과제로 삼기에도 충분하다. 울산의 문화콘텐츠로도 손색이 없다.

<강귀일 취재1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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