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회-10. 그 겨울의 비(6)
109회-10. 그 겨울의 비(6)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1.0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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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저녁 무렵부터 시작된 비는 밤에 천둥번개까지 치더니 새벽녘이 되면서 빗방울은 더 굵어졌다. 진수라니 왕은 빗소리에 잠을 설치다 새벽녘에 잠시 잠이 들었다 다시 깨었는데, 아직 온천지가 캄캄하였다. 그 캄캄한 하늘을 뚫고 창대 같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침전의 문을 열고 보니 궁성은 온통 빗줄기의 창살에 갇혀 버린 것 같았다. 그 창살의 빗줄기들은 성벽에 부딪혀 깨어지기도 하고 꺾이기도 하며 바닥에 스러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처절했다. 칠흑 같고 그 캄캄한 허공을 뚫고 와서 성벽에 머리를 박고 쓰러지는 처절한 빗줄기의 최후를 바라보면서 전장에서 쓰러지는 처절한 병사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저 빗줄기는 전장에서 쓰러진 병사들의 처절한 절규이며 그 눈물일 수도 있겠구나. 내가 그들의 눈물이 될 수 있다면, 내가 그들의 눈물이 되어서 대신 울어 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나는 그들의 눈물이 되지 못하고, 이 나라 만백성의 눈물이 되어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지도 못하고 애처롭게 저 빗줄기만 바라보고 있구나. 나는 그들의 눈물이 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내가 만백성의 눈물이 되어 그들의 눈물을 막아줄 수는 없을까?

저 어둠 속에서도 해는 다시 떠오르는 것일까? 떠오르지 말아야 할 해는 다시 저 어둠 속에서도 떠오르는 것일까, 저 비의 창살을 맞고 쓰러졌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일까? 비는 어디서 저렇게 몰려오는 것일까. 근원을 알 수 없는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와서 투신하는, 투신하여 산산이 깨어지는 빗줄기는 역사의 울부짖음과 다르지 않구나.

진수라니 국왕은 어두운 마음으로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문을 닫고 잠자리로 돌아와 앉았으나 어두운 마음은 가시지 않고 빗소리에 섞여 더 어두워졌다.

아침나절이 되니 빗줄기는 더 거칠어졌다. 그 빗속에 말울음 소리가 들렸다. 어디 먼 곳으로부터 달려온 듯한 숨 가쁜 말소리인 것 같았다. 누군가 말을 타고 궁성의 문 앞에 와서 내렸다. 꼭 삼년 전 이맘때쯤 신라에 투항한 하한기 진파라였다.

“불초 진파라 전하께 문안드리옵니다. 불철주야 나라 일로에 번민하시는 그 세월 동안 옥체만강 하시나이까?“

진파라는 머리를 바닥에 박고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박제된 토우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비에 젖은 옷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정전의 바닥을 적셨다.

“차마 고개 숙이기에도 황공하고, 죽어 마땅하오나 전하를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진파라의 말을 듣고도 진수라니왕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싸늘했다. 마치 살 속을 파고드는 비수처럼 싸늘했다. 진파라는 자신에게 떨어지는 어떤 가혹한 말보다도 그 침묵이 더 가혹했다. 침묵은 그 시간이 길수록 더 가혹했다.

“이 나라를 떠난 것도 다 나의 업이었다면 이렇게 찾아온 것도 또한 소인의 업이 아닌가 생각되옵니다. 소인이 이 나라를 떠날 때는 이 나라의 관리로서의 선택이었다면, 오늘 이렇게 전하를 배알한 것 또한 한 나라의 관리로서의 선택이옵니다.”

왕의 동생 진파라가 말했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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