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어 가득 자유를 눌러 담고
캐리어 가득 자유를 눌러 담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10.05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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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만에 여행에서 돌아왔다. 여독이 어깨 위를 짓눌렀지만 비웠던 일상들로 돌아오자마자 걸음이 분주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눈앞에 멋진 아드리아해의 푸른 바다와 환상적인 저녁놀이 어른거리고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총탄자국 선명한 집들도 마치 지금 눈앞의 현실인 듯 스쳐지나간다.

늘 여행을 할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왜 이 여행을 선택했는가?’ 하고.

이번여행은 평범한 즐거움의 여행만은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매스컴으로 책으로 영화로만 보고 듣던 곳을 언젠가 한번 꼭 가보고 싶었고 인종과 종교와 문화의 충돌이 격렬했던 시대의 잔상과 그림자를 밟아보며 느껴보고 싶기도 했었다. 현장감은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났다. 과거와 현재가 엄밀히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소름이 돋았다.

여행의 목적은 다양하다. 대개의 사람들은 멋진 풍광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떠나기가 보통이다. 그러나 여행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여전히 일상의 탈출과 완전한 자유에의 갈망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명쾌하게 ‘인간은 자유다. 인간은 자유 그 자체다.’ 라고 했다. 인간자체를 자유라고 규정짓는 것보다 더 인간과 자유와의 불가분의 관계를 설명할 말은 없는 듯하다.

사람들은 여행지에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구속도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유, 최대의 자유를 꿈꾼다. 그러기에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보다 누구와 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고 사소한 것조차 신경 쓰이지 않는 상대라면 좋겠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라면 개인적으로는 혼자 떠나는 것도 진정한 여행이 되지 않을까 싶다.

여행중반, 습도 없이 기분 좋은 발칸의 지중해한낮더위에도 지치긴 했다. 저녁이 되어 호텔식당에서 식사를 하기로 되어있었지만 아무리 식성이 좋다고 해도 이방의 음식은 매끼마다 먹기에는 힘들었다.

낯선 향신료와 간이 센 음식에 속은 점점 질려가고 있었다. 그나마 들뜬 속을 조금 가라앉히는 건 그래도 분위기와 함께 마시는 와인이나 맥주 한 잔이었다.

물이 귀한 유럽에서 목마르고 지친 영혼에게 맥주는 특히 환상적인 음료였다. 그런데 만류하는 일행의 한마디에 여행에서의 즐거운 하루 저녁식사를 망쳐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불쾌하고 불편했다.

사소한 일 하나 때문에 여행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문제는 맥주가 아니라 역시 자유로움에 대한 문제였다. 일상에서의 별 대수롭지 않던 일들도 여행지에서는 예민하고 민감해진다. 타인에게 불편을 주고 불쾌감을 주지 않는다면 여행지에서는 누구에게나 완전하고 충분한 자유는 필요필수조건이다.

시차휴유증과 함께 괜한 짜증이 잠시잠깐 나를 괴롭힌 탓인지 아드리아해의 멋진 일몰 앞에서 그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마 자연의 아름다움 앞이라 순간 감정이 더 격해졌을 것이다. 그냥 뜨겁게 길게 울고 싶었다.

자유는 물론 주어지면 더 높은 수위의 자유를 원하게 되고 언제나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지만 주어지는 만큼 책임도 비례한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그것을 감당할 수 있다면 누구나 충분한 자유를 누릴 권리는 있다. 특히 삶의 비상구같은 여행에서는 누구나 자유로워져야하고 그 허용치는 최대이어야한다.

이제 나는 또 캐리어 가득 자유를 꾹꾹 눌러 담고 어느 때쯤 긴 여행을 떠날 것이다.

<이정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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