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책임관’이란 자리
‘국어책임관’이란 자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9.28 20: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귀에 설기만 한 용어이지만 울산시에도 ‘국어책임관’이란 자리가 곧 만들어질 모양이다. 제6대 울산시의회의 첫 임시회(제163회) 마지막 날인 지난 7월 29일의 마지막 본회의에서 ‘울산광역시 국어 진흥 조례안’이 무사히 통과의례를 마쳤기 때문이다.

‘국어책임관’에 대한 규정은 이 조례안 제9조(국어책임관의 지정 및 임무)에 나온다. 제1항은 “시장은 문화 담당 부서장 또는 이에 준하는 직위의 공무원을 국어책임관으로 지정하여야 한다.” 국어기본법 시행령을 따른 조치다.

이 규정대로라면 울산시에서는 문화예술과장(또는 그에 준하는 공무원)이 그 자리를 맡아야 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시간과 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국어기본법 시행령이 정한 국어책임관의 임무는 실로 엄청나다. ▲해당 기관의 정책을 효과적으로 국민에게 알리기 위한 알기 쉬운 용어의 개발과 보급 및 정확한 문장의 사용 장려 ▲해당 기관의 정책 대상이 되는 사람들의 국어 사용 환경 개선 시책의 수립과 추진 ▲해당 기관 직원의 국어능력 향상을 위한 시책의 수립과 추진 ▲기관 간 국어와 관련된 업무의 협조가 그것이다.

이 일을 문화예술과장이 맡아서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인다. 아니 ‘불가능’이란 말이 제대로 된 표현일 것이다. 알기 쉬운 용어를 개발해야 하고, 직원들 국어능력 향상에도 힘써야 하고, 하루에 여러 건인 보도자료가 정확한 우리말로 작성됐는지도 살펴야 하는데, 이 초인적인 능력을 비전문가 공무원에게 맡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본업이 따로 있다 보니 국어책임관은 이 일에만 매달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예술과장이 당연직으로 국어책임관을 겸임한다는 것은 무리다. 다른 시·도의 어느 기관이나 다 그렇다. 그러기에 울산시 조례의 경우 제9조 규정 자체가 잘못이다.

울산시는 올해가 훈민정음 반포 568돌과 외솔 선생 탄생 120돌을 기념하는 뜻에서 ‘울산광역시 국어 진흥 조례’ 제정을 추진하고 있노라고 지난 4월 30일 밝힌 바 있다. 당연히 큰 박수를 여러 차례 받아야 할 장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의욕만 앞섰지 현실을 외면한 게 아닌가 하는 점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무리수를 둘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거름 지고 장에 간다”는 옛 속담이 딱 어울리는 대목이다.

이 조례안을 시가 건네준 자료를 바탕으로 대표 발의했던 김정태 시의원은 ‘붙임 1’을 통해 다른 시·도의 조례 운영 현황을 소개했다. 서울시의 8개 기초단체, 부산시와 북구·해운대구, 세종시, 강원도와 원주시, 충북 제천시, 충남, 전남, 경남도와 창원시, 그리고 울산 중구가 비슷한 내용의 조례를 이미 제정했다고 전했다. 광역 또는 기초 자치단체 20곳 중 13곳은 지난해(2013년)에, 나머지 7곳은 올해 제정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서울 종로구는 지난해 제정이 아니라 개정을 마친 것으로 나와 있으니 가장 선두주자인 셈이다.

그런 차제에 훈민정음 반포와 외솔 선생 탄생을 기릴 겸 조례를 제정한 것은, 어찌 보면 자존심을 지키겠다는 가상한 노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문제가 나타난다면 눈에 보이는 즉시 바로잡는 것이 바른 행정의 자세가 아닐까. 4급 서기관에게 국어책임관이란 자리, 그 벅찬 임무를 맡기기가 좀 뭣하다면, 행정기관 바깥에서 전문가를 찾아보는 것도 지혜로운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정주 선임기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