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아오자이’
사라진 ‘아오자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9.0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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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5일 베트남 국적기에 탑승했다. 45년만에 찾아가는 베트남이었다. 설레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서해와 중국 남쪽 항로를 거쳐 보인303은 비행 4시간 30분만에 하노이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하노이 땅을 밟는 순간 뭉클한 감정의 유입과 함께 격세지감이 밀려왔다. 베트남 북위 17°선을 경계로 분단됐을 때 필자는 그 남쪽에서 북쪽 공산 베트콩과 싸웠다. 하노이는 당시 우리에게 금단의 적국땅이었고 월맹을 통치하던 ‘호치민’은 우리가 타도해야할 주적(主敵)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주적의 땅을 밟고 있었다.

하노이 공항에서 버스로 이동, 아리랑이라는 한국 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쌀국수를 먹었다. 역시 본토에서 먹는 쌀국수는 맛있었다. 이어서 호치민 박물관을 방문했다. 호치민의 집무실, 회의실의 사용집기 등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국의 대통령 집무실이라고 보기엔(전쟁중이였지만) 너무도 초라했다. 검소했던 호치민의 생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병사 4명이 지키고 있는 방부 처리된 호치민의 시신은 살아있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저렇게 작은 체구의 인물이 베트남 통일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니.

그는 프랑스 96년 식민통치를 1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종식시켰다. 또 중국의 43년 식민통치 역시 2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승리로 마감했다. 그다음 미군정 역시 끈질긴 게릴라전으로 1974년 완전 종식시키고 남북 베트남 통일을 이룩해 냈다.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손들 수밖에 없었던 3가지 요인은 ‘구찌 터널’,‘호치민루트’, ‘호치민 정신’이었다.

특히 ‘구찌 터널’은 터널이 있는 구찌 마을을 미군이 초토화하려고 했지만 지하 50m지점에 3층의 개미굴처럼 얽히고 설켜 있어 결국 포기하고 만 것으로 유명하다.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독립투쟁을 하다 추방되어 베트남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름을 3번 바꿨다고 한다. 마지막이 호치민이었다. 그의 형과 누이는 대통령이 된 그를 찾아왔다가 “미국과 전쟁하고 있는 동생에게 부담이 돼선 안 된다”며 하루 만에 돌아갔고 호치민 역시 “나 때문에 형제들에게 누가 돼서는 안 된다”며 베트남 통일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죽을 때까지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호치민이 늘 정약용이 쓴 ‘목민심서’를 탐독했다는 사실이다(호치민은 6개 국어에 능통했다). 죽기 직전 미국과 한국을 미워하지 말라고 유언까지 남겼다는 사실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호치민시는 한 때 동양의 파리라 일컫던 사이공시이다. 자금은 인구 천만의 베트남 경제중심지이다. 필자는 호치민시에서 약 40㎞ 정도 떨어진 “디안”이라는 곳에서 비둘기 부대원으로 근무했다. 당시 호치민시에는 한 달에 2~3회 정도 갔었는데 45년 만에 다시 본 그곳은 변할 대로 변해 있었다. 당시 흰색과 검은색 바지의 아오자이를 입고 긴머리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베트남 여성은 온데 간데 없었다.

‘아오(흰색 겉옷) 자이(검은색 긴바지)’는 사라지고 핫 팬츠에 쫄 바지 차림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베트남 아가씨들만 보였다. 다소 아쉬웠지만 요즘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는 베트남의 변화에서 필자는 많은 가능성을 발견했다.

사라진 아오자이. 어느 나라든 여성의 얼굴이 밝고 건강하면 그 나라는 잘 사는 나라라고 말한 어느 페미니스트의 말이 기억났다. 하루 종일 오토바이 소음의 물결 속에 5일을 보내고 서울에 도착하니 마치 타국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토바이 대신 흐르는 승용차의 물결은 너무 조용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계절로 축복받은 대한민국에 사는 필자는 행복함에 틀림없다.

<이영조 중구 보훈단체 협의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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