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이 남기고 간 빛 아직도 눈부시다
교황이 남기고 간 빛 아직도 눈부시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8.21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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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산 그늘이 강동 팔 십리를 간다는 말이 있다. 때로는 권세를 누리는 사람의 여파가 커서 친인척이나 주변 사람들이 덕을 본다는 그저 그런 의미를 포함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은 다르다.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은총과 평화수호자의 상징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4박5일의 한국방문을 마치고 돌아갔다. 짧은 방한기간에 교황은 이 땅에 충격과 환희의 빛을 남기고 갔다. 충격과 환희 빛을 남겼다는 말이 단순한 헌사가 아니다.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다. 그러나 교황의 방한 4박5일에 덩달아 평온과 기쁨을 느꼈고 희망을 보았다.

세상은 보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나는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정치의 진수를 보았다. 동양의 현자 노자는 최선의 정치는 그것이 정치인 줄을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라고 하였다. 없는 듯하면서도 세상을 아우르고, 아무것도 안 하는 듯 하면서도 모든 것을 다하는 것이 좋은 정치, 선한 정치라는 뜻이다.

교황은 그냥 스쳐가면서도 도도한 권세와 그늘진 곳에 소외된 이들을 아우르고, 손 한번 잡아 가슴에 맺힌 한과 아픔을 덜어내 주었다.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정치의 모습이 아닐까. 갈등과 미움으로 얼룩진 것을 풀어주고 다독여 함께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정치의 소임이라면 그 실천은 바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광화문 시복미사 현장에 모인 100만여 인파 중 신자는 절반에 못 미치고 대다수의 인파는 평화와 행복에 목이 말라 스스로 모여든 보통시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하지만 무섭지 않고, 막강하지만 견고하거나 무겁지 않은 은총 가득한 권세를 함께 누린 것이다. 정작 이 땅에서 정치로 밥을 먹는 이들은 이 작은 행복을 알기나 하는지….

교황방문은 동방의 이 작은 나라를 세계 속에서 큰 복을 받은 나라라는 징표로 확인해 주고 갔다. 우리에게는 병인, 신유, 기해사옥 등 이름만 들어도 선혈 낭자한 핍박과 고난의 시간을 떠올리며 전율하게 되는 역사의 순간이 있었다. 그 어둡고 무서웠던 역사의 한 장면에서 믿음과 목숨을 바꾼 124위의 영혼이 시복시성으로 다시 태어났다. 우리는 이미 103위의 성인시성식 30주년에 이른다. 이번 시복으로 하여 세계교회사의 빛나는 또 한 쪽으로 남게 되었고, 이는 암흑이 문명으로 재탄생 하는 징표가 된 것이다.

신의 대리인으로서 교황은 교회에 만이 아니라 우리 땅, 우리역사에 복을 전해 주었다. 이 또한 우리에게는 빛과 희망이다. 교황은 분단된 한반도에 화해와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고 권고함을 잊지 않았다. 비록 갈등과 미움이 있을지라도 일곱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번이라도 용서하고 화해의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조용히 말해 주었다. 이제 우리는 교황은 떠나갔지만 그가 남기고 간 말 “사랑하세요, 깨어나세요, 화해하세요, 연대하세요, 낮아지세요” 다섯 마디는 가슴에 남아서 되 뇌이고 중얼거릴 수 있게 되었다.

정치의 혼돈, 분단의 비극, 약자의 슬픔을 잊지 말고 깨어나 사랑하고, 용서하고 몸과 마음을 낮추어 손잡고 함께 헤쳐 나가라는 오복음을 주고 떠난 교황의 남은 빛에 아직도 눈이 부시다. 수양산 그늘은 강동 팔 십리가 아니라 지구 저편 사십 만 리에 이른다.

<박기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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