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회-5. 부왕의 죽음(8)
56회-5. 부왕의 죽음(8)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8.19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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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늘밤 이승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내일이면 캄캄한 지하의 세계로 보내드려야 하는 적막한 시간 진수라니의 뇌리엔 부왕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그것은 분명 사랑과 나라 사이에서 번민했을 한 인간의 모습이었다. 아버지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몇 번이나 어린 진수라니를 앞에 앉히고 말했다.

“나는 너의 친모였던 왕비를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는 나의 선왕이 나에게 씌워준 그 국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에 비(妃)를 폐했다.”

부왕의 말은 언제나 그쯤에서 끊어졌다. 다시 부왕이 말을 잇기 위해서는 회한 어린 무거운 침묵의 시간이 지나야 했다. 부왕은 다음 말을 잇기 전에 언제나 어린 왕자였던 진수라니의 눈을 보았다. 진수라니의 또렷한 어린 눈망울을 보고나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한나라의 왕의 자리란 것은 인간의 자리가 아니다. 그 자리는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일과 인간으로서 걸어갈 수 없는 길을 걸어가야 하는 자리다. 때로는 칼날 같은 냉정함으로 스스로의 뜨거운 가슴을 묻어야 하는 자리다.”

그래서 스스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한 여자의 남자가 될 수 없었다는 말이었을까? 부왕은 스스로, 세 명의 왕자를 낳은 자신의 비(妃)를 유폐하고 폐출시켰다. 그리고 마침내는 한 명의 왕자마저 딸려 비의 나라, 졸마국으로 돌려보냈다. 부왕은 두 번 다시 비를 거론하지 않았다.

왕비의 죄는 국법을 어긴 것이었다. 그녀는 졸마국의 왕족 중에 한 사람이었던 졸야성의 성주의 딸이었다. 아름답고 총명하였다. 다라국의 태자 진패주가 그녀를 만났던 것은 졸나국과 걸손국(산청)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을 때였다. 그때 다라국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걸손국에 파견되었던 진패주는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그곳 졸야성 성주의 딸로서 여전사였다. 진패주 태자가 이끄는 병력이 졸마국의 병사를 물리치고 포로를 잡았는데 거기에 그녀가 포함되어 있었다. 포로로 잡힌 졸마국 성주의 딸을 걸손국왕은 진패주에게 전리품으로 주었다. 그녀를 다라국으로 데려가게 하였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갑옷을 벗은 여전사는 아름다웠다. 진패주는 그녀의 자태에 매혹되었다. 그녀를 말에 태워 데려오는 길은 황홀했다. 그러나 진패주는 도중에 그녀를 놓아 주었다.

“낭자, 그대가 나를 사랑한다면 다음 보름달이 뜰 때 황강변으로 오시오.”

그 말을 하고 진패주는 그녀를 말에 태워 자신의 나라로 돌려보냈다. 달이 바뀌고 눈썹 같던 초승달이 함지박 같은 보름달이 되어 뜨는 날 왕자는 황강변으로 나갔다. 온 천지가 달빛으로 묻혀버린 강변, 잠 못 이룬 들새가 어디선가 울어대는 가을밤이었다.

그녀가 왔다. 멀리서 말 달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녀가 나타났다. 둘은 말이 필요 없었다. 말보다 더 뜨거운 가슴으로 서로를 안았다. 서로의 가슴은 뜨거웠다. 둘은 함께 말을 타고 들을 달렸다. 새벽 별이 빛을 잃어갈 무렵 그녀는 돌아갔다.

글=이충호/그림=황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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