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녀의 재발견
해녀의 재발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8.1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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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돌과 여인이 유난히 많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 ‘三多島’ 제주. 여행을 가 본 것은 20여년 전 딱 한번이었지만 제주 여인네들과의 연은 태어날 적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바닷가를 낀 부산의 고향마을엔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제주에서 이주해 온 해녀들이 무리지어 그녀들만의 터전을 일구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선 이런 여인들을 ‘출가해녀(出稼海女)’라고 부른다. 그들은 일본 해녀의 원조가 제주 해녀였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는다. 해녀들의 물질 작업을 가리켜 그들은 ‘나잠(裸潛)’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실제로 현지 사진에 나타난 일본 해녀들은, 관광 홍보용 작품인지는 몰라도, 윗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반라(反裸)의 모습들이다. 가슴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으니 ‘나잠’이란 표현이 차라리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

그러한 자태는 요즘 우리나라의 해녀들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아래위를 불문하고 ‘원피스 형’ 잠수복을 입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잠업(裸潛業)’, ‘나잠회(裸潛會)’란 용어가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된다. 울산 해녀 모임의 이름도 ‘울산나잠회’다. 일제의 잔재일까.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척박하고 고달픈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한 제주 해녀. 그녀들은 우리나라 남해안과 동해안, 멀리는 울릉도, 독도에도 흔적을 남겼다. 심지어는 일본 해역과 러시아 해역에까지 생존의 손길을 뻗치기도 했다.

제주 해녀들의 잔상(殘像)이 아직껏 지워지지 않고 남아있는 것은 살아생전의 모친 덕분이었다. 제주 여인네들과 유달리 친분이 두터웠던 어머니를 통해 그녀들의 일상은 자주 그리고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녀들의 용모와 말씨, 살아가는 방식까지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때의 추억이 남겨준 선물이었다.

명절이면 ‘제주도 엄마’는 손수 빚은 ‘달떡’을 쟁반에 담아 집으로 가져오시곤 했다. ‘몸보신’에 좋다는 흑염소를 일 년에 꼭 한 마리씩은 고아 잡숫기도 했다. 염소고기 맛을 난생처음 맛본 것도 그 때의 일이었다.

제주 해녀의 존재를 울산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제5대 울산시의회 의원을 지낸 이은주씨를 알게 된 덕분이었지만 지금은 제6대 강대길 여당 의원이 그 역할을 대신 맡고 있다. 권명호 동구청장과 슬도 앞 ‘해녀의 집’에서 성게미역국을 맛있게 나눠먹던 때는 권 청장이 제5대 시의원으로 활약하던 시기였다.

제6대 들어 처음 12일부터 2박3일 동안 갖는 ‘울산시의원 연찬회’의 장소는 제주도로 정해졌다. 이틀째 일정에는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있는 ‘제주해녀박물관’ 견학이 잡혀 있다. 제주 본토 해녀들의 생활상을 더듬어볼 수 있는 모처럼의 기회가 시의원들에게 주어진 것.

시의원들은 해녀박물관에서 전해오는 속담을 통해 뜻 모를 제주 해녀 그녀들만의 은근한 속내를 훔쳐보게 될 것이다. 제주 여인네들 특유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에서 여존남비(女尊男卑) 사상까지 고루 접하게도 될 것이다.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태어나는 것이 낫다)거나 “딸 나믄 도새끼 잡앙 잔치하곡 아들 나믄 발질로 조름팍 찬다”(=딸을 낳으면 돼지를 잡아 잔치하고 아들을 낳으면 발길질로 엉덩이를 찬다)는 속담에 이르기까지.

시의원들은 또 제주 해녀들의 생활사를 통해 제주에서 울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긴 '출도해녀(出島海女')와 육지 본토 해녀들의 존재감을 새롭게 발견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사라져가는 그녀들의 값어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자 떠나자! 해녀의 섬 제주로!

<김정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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