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여는 문(門)
미래를 여는 문(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8.0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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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597년(선조 30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서 단 12척의 배로 330척의 왜선을 무찔렀다. 당시 조선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최종병기 활’을 감독한 김한민 감독이 국민배우 최민식을 내세워 충무공 이순신을 기린 영화 ‘명량’의 주된 내용이다. 영화 속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선조를 비롯한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 백성들의 가난과 허기, 임진왜란이란 전쟁이 가져온 절대절망, 이처럼 희망이 모두 사라져버린 현실의 지배자는 두려움이었다. 그때 충무공이 잡은 것은 불퇴전의 용기였고 눈부신 찬연한 미래였다.

영화 ‘명랑’은 40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현재진행형으로 우리 앞에 재현되고 있다. 미래를 여는 문(門)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용기를 가지고 미래의 손잡이를 잡는 것도 나의 손이요, 두려움에 빠져 절망으로의 문을 여는 것도 나의 손이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천국과 지옥의 사람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았다. 천국에 있는 사람들 앞에 긴 테이블이 놓여 있고, 음식 담긴 그릇과 수저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수저의 모양새가 희한했다. 아주 가늘고 길었다. 그곳 사람들은 수저로 자신을 먹이지 못했다. 팔 길이 보다 길어서 자신의 입안으로 넣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맛나게 식사를 하고 배부르게 됐다. 한편 지옥의 사람들 앞에도 긴 테이블이 놓여 있고, 음식 담긴 그릇과 수저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도 수저의 모양이 특이했는데, 모두 가늘고 길었다. 그런데 그곳의 사람들은 하나도 먹질 못하고 배부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천국과 지옥의 사람들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해답은 너무 쉬웠다. 천국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에게 먼저 먹여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먼저 맛나고 배부르게 먹은 사람이 상대에게 똑같이 먹여줬기 때문이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한사코 자기만 먼저 먹으려니 음식을 흘리게 되고, 아등바등 자신만 챙기니 그릇이 깨져버렸던 것이다. 이웃과 더불어 협력하고 남도와주는 것은 천국과 지옥을 두 개의 세계로 구분 짓는 경계선이었다. 미래를 여는 문(門)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다. ‘이웃과 함께 더불어 어울림’이란 천국의 문패를 달 것인지 ‘나 홀로 따로 외롭게’라는 지옥의 문패를 달 것인지 결정은 각자의 몫이다.

계절의 순환처럼 역사는 반복된다. 구한말을 지나 일제 강제 합병과 식민지배는 충무공 이순신의 무덤에 침을 뱉는 행위에 다름없을 만큼 후손들의 국가적 치욕이었다. 어찌 그렇게 뼈아픈 역사적 교훈을 쉬이 잊어버린단 말인가. 일제 36년간의 통치 속에 식민지 한민족은 말과 글을 잃고, 땅도 주권도 나라도 잃었다. 젊은이는 전쟁터의 총알받이로 끌려가고 여성들은 위안부로 끌려가도 지켜주는 이 없었다. 독립투사들의 항거와 민족애를 지닌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맞은 광복도 잠시 또 서기 1950년 6월 25일에 동족상잔이 일어났다. 그 비극은 남북한을 두 동강내었고,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세계 경제 10권으로 도약했지만 군사정권과 민주화를 거치면서 갈등이 상존하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 교훈을 잊지 말고 뼛속 깊이 새겨야 한다.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고, 정치인들은 하나가 돼야 한다. 국민들은 분노를 내려놓고 지도자를 믿어보자. 임진년 보다는 좋은 세상이고, 경술년 보다는 좋은 세상이지 않은가. 미래를 여는 문의 손잡이는 바로 지척에서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이금희 굿뉴스 울산 발행인·언약의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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