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에 얽힌 설화
쥐에 얽힌 설화
  • 김영수 기자
  • 승인 2007.12.3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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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예지‥ 근면·多福 상징
수만년 전부터 인류와 가깝게 살아와

서출지, 김유신 장군 묘 등 삼국유사 쥐 출현 기록

괘릉·능지탑·흥덕왕릉·성덕왕릉 등 12지상 뚜렷’

△ 서출지

▲ 서출지

경주 남산동 통일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남산 등산로로 접어들면 조그만 연못과 정자하나가 보인다. 신라 때부터 내려오는 저수지라고 알려진 서출지와 조선시대 임적이라는 사람이 새운 이요당(二樂堂)이라는 정자가 바로 그것이다.

화려했던 연꽃이 다 져버린 음산한 분위기의 연못. 이 연못에 쥐와 관련된 설화가 삼국유사 서금갑 조에 전해오고 있다.

서기 488년 신라 소지왕이 기슭에 있었던 천천정에 거동했다. 이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써 ‘이 까마귀가 가는 곳을 쫓아 가보라’라고 하므로 괴이하게 여겨 신하를 시켜 따라가 보게 했다.

그러나 신하는 이 못가에 와서 두 마리의 돼지가 싸우고 있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까마귀가 간 곳을 잃어버리고 헤매고 있었다.

이때 한 늙은이가 못 속에서 나와 글을 올렸는데, 그 글 겉봉에는, “이 글을 열어 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 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입니다”했다. 신하가 돌아와 소비왕에게 바치니 왕이 말했다.. “두 사람을 죽게 하느니보다는 차라리 열어보지 않아 한 사람만 죽게 하는 것이 낫겠다.”.

이때 일관(日官)이 아뢰길. “두 사람이라 한 것은 서민(庶民)을 말한 것이요, 한 사람이란 바로 왕을 말한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옳게 여겨 글을 열어 보니 “거문고 갑을 쏘라[射琴匣]”고 했을 뿐이다. 왕은 곧 궁중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匣)을 쐈다. 그 거문고 갑 속에는 내전에서 분향수도하고 있던 중이 궁주(宮主)와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을 사형에 처했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그 나라 풍속에 해마다 정월 상해(上亥)·상자(上子)·상오일(上午日)에는 모든 일을 조심하고,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15일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하여 찰밥을 지어 제사지냈으나 이런 일은 지금까지도 계속 행해지고 있다. 노인이 나온 못을 이름해 서출지(書出池)라고 했다.

연꽃이 만발한 서출지의 여름 풍경을 기대하고 온 기자에게 사진작가 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서출지의 연꽃은 입추 전후가 가장 아름답고 특히 아침의 연꽃은 환상적이지요”.

“그러나 화려한 서출지의 연꽃을 준비하는 겨울철의 서출지도 매력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 준비 없는 결과가 어디 있겠어요?”

△괘릉 12지신상

▲ 괘릉

울산에서 경주로 가는 국도변에 괘릉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들어가면 울창한 소나무가 우리를 맞는다.

괘릉은 원래 이곳에 작은 연못이 있었기 때문에 왕의 유해를 연못위에 걸어서 장사지냈다는 속설에 따라 붙여진 것이다.

괘릉 안에는 문인석과 서역인의 풍모를 가진 무인석이 자리 잡고 있다.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봉분 밑 둘레에는 호석과 그 주위에 수십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둘렀고 호석에는 쥐를 비롯한 12지신상이 양각으로 조각돼있다.

△ 구정동 방형분 12지신상

▲ 방형분

괘릉에서 나와 불국사로 가는 삼거리 좌 측편에 단아하게 위치하고 있는 사각형의 고분.

고분의 주인을 알지 못해 지명인 구정동의 명칭과 사각형의 무덤양식에서 따와 구정동 방형분이라고 불린다. 이 방형분에도 12지신 상이 자리 잡고 있다.

누구의 무덤인지도 모르지만 처음 받은 임무, 묘를 지키는 일을 아직도 묵묵히 하고 있는 12지신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성덕왕릉 12지신상

▲ 성덕왕릉

성덕왕릉은 광고영상박물관 근처 효소왕릉 옆에 위치하고 있다.

성덕왕릉은 신라최초의 완비된 형식을 갖춘 능묘로 평가받는다.

삼각형 받침돌 사이에 입체의 십이지신상이 배치돼 있다. 십이지신상은 동물의 머리와 사람의 몸 형태로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원숭이 상과 닭상을 제외하고는 머리 부분이 심하게 훼손돼 있다. 원숭이 상은 경주국립박물관에 본 모습 그대로 보관 중이며 닭 상은 온전한 모습으로 성덕왕릉에 자리하고 있다. 머리부분이 사라졌기 때문에 12지상이 모두 제자리에 있는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쥐상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는 북쪽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는 석상 촬영했다.

△ 헌덕왕릉 12지신상

경주에서 보문단지로 가는 북천 북안로 바로 밑에 신라 41대 헌덕왕릉이 있다.

헌덕왕릉을 찾은 시간이 해가 저무는 시기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너무 음산해보였다.

헌덕왕릉은 여러번의 수해로 둘레에 세운 십이지신상을 비롯한 석물들이 떠내려 가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원래 이 능은 문무석, 돌사자, 돌난간 등으로 호화롭게 꾸몄지만, 호석마저 대부분이 씻겨가고 북쪽 신상들만 남아 있다.

간신히 남은 쥐, 소, 범, 토끼, 돼지상도 차가운 겨울바람에 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헌덕왕은 재위 기간중 2차례의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후기신라의 국력이 쇄약해져 가는 시기의 왕으로 여러번의 홍수는 실정에 대한 인과응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감히 들었다.

△ 김유신 장군묘

▲ 김유신장군 묘

경주를 가로지르는 형산강 옆, 작은 구릉위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묘. 삼국통일의 혁혁한 공을 세워 흥덕왕때 흥무대왕으로 추증됐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둥근 봉분을 가진 커다란 규모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돌난간을 둘렀다.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했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얕게 조각돼 있다.

김유신 장군과 관련해서는 삼국유사에 이런 전설이 전한다.

고구려 보장왕때 국경지방의 강이 엎치락 뒤치락 거리는 일이 있어 추남에게 점을 치길 명했다. 추남이 대답하길 “대왕의 부인이 음양의 도를 역행 했으므로 그런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왕은 이를 이상히 여기고 왕비는 대노해 이것은 요망한 여우의 말이라 대왕에게 다른 일을 물어보아 알지 못하면 중형을 가하라고 했다.

이에 왕은 함속에 쥐 한마리를 숨겨놓고 물었다. “이 속에 무엇이 들었느냐?”

추남이 대답하기를 “ 이것은 반드시 쥐인데 여덟 마리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틀렸다며 추남을 죽이려고 하자 “내가 죽은 뒤에 대장이 돼 반드시 고구려를 망하게 하길 원합니다”라고 했다.

추남을 죽이고 괴이하게 여겨 쥐의 배를 갈라보니 일곱마리 새끼가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말이 맞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날 밤 대왕의 꿈에 추남이 신라 서현의 부인 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신하에게 말하자 “추남이 마음속으로 맹세하고 죽더니 과연 그렇게 됐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신라 김서현과 만명부인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바로 김유신이다.

△ 흥덕왕릉 12지신상

▲ 흥덕왕릉 12지신상
흥덕왕릉 앞에는 도레솔이라고 불리는 소나무들이 있다. 이 도레솔이 흥덕왕릉을 더욱 장엄하게 만든다.

흥덕왕릉에는 흥덕왕과 장화왕비의 사랑이야기가 숨어있다.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2달 만에 먼저 장화왕비가 병사했다. 신하들은 다른 왕비를 맞기를 권했지만 왕은 응하지 않았다. 10년이 지나 왕이 숨을 거뒀고 생전의 유언대로 왕비와 합장했다.

이런 흥덕왕과 왕비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서역인의 형상을 한 무인상과 석물이 왕릉을 지키고 있었다.

흥덕왕릉 12지신상 중에서 쥐만이 유일하게 천의(天衣)를 걸친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12지신상의 가장 윗자리인 쥐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특별 대우를 해준 것은 아닌지?

/ 김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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