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 탈출 ‘야구장’
우울 탈출 ‘야구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6.11 21: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 멀리서 하얀 깃발이 내렸다. 대여섯마리의 말이 먼지를 내면서 동선을 그리듯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다. 거리를 말하면 수 킬로 될 듯하다. 전망 스탠드 위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스탠드 바닥에는 복권 모양의 하얀 종이가 여기저기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이 모습은 필자의 어릴 때 고향의 한 장면이다. 지금에서야 알고 보니 그곳은 필자의 집 근방에 있는 경마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것인데 가운데는 논밭이거나 저수지 또는 농사짓지 않는 빈 땅들로 채워졌다. 동네 아이들한테는 그야말로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인 셈이다.

필자의 어릴 때 ‘놀이’는 주로 동네끼리 야구공을 걸고 하는 야구시합이다. 그때부터 대구는 야구 도시답게 야구가 붐을 이뤘던 것 같다. 거기에 필자도 한몫 했다. 동네 팀에서 캐처 포지션을 맡아 전체 아이들을 리드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피처가 힘껏 던지는 센 공을 타자 바로 아래에서 받으려니 보통 위험한 포지션이 아니다. 가끔 잘못 잡아 직방으로 맞아 혼쭐이 난 적도 있었으니….

그 당시 1루를 맡고 있던 친구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히 난다. 야구 명문 고등학교의 4번 타자가 되어 훗날 프로에서도 유명스타로 활약했던 친구 말이다.

몇주 전 가족과 함께 오랜만에 야구장을 찾았다. 울산도 이제 문수야구장이 오픈돼 프로경기를 볼 수 있어 야구팬들에게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커플석도 있고 바비큐를 구워먹으면서 구경할 수 있는 좌석도 있어 꽤 격조 있는 명품 구장이다.

무엇보다 세상살이에 찌든 팬들의 환한 얼굴을 보면 괜히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살맛이 난다. 빽빽이 차 있는 관중석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 홈런의 함성소리가 떠나갈 듯하다. 무엇보다 직접 선수로 뛰는 것은 아니지만 선수의 마음으로 이래저래 게임을 구상해 봄은, 정신건강 즉 ‘우울 탈출’에 큰 도움이 되는 듯하다.

미 시사 주간지 타임이 선정한 20세기 100대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에리자베스 로스(E. K. Ross·1926~2004)가 있다. 그녀는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자기의 일생을 다 바쳤다. 죽음에 임박한 말기환자 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심리적 변화를 흥미롭게 제시한 것이다.

즉 상실 후 겪게 되는 ‘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는 Dabda모델의 단계적 심리이다. 어느 날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암 진단 판정을 받고 얼마 살지 못할 것이란 결과를 들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처음에는 그 진단이 잘못돼 아니라고 부정(deny)하는 것. 다음에는 하필 왜 나에게 이런 병이 생겼는지에 대하여 분노(anger)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신에게 구원하면서 타협(bargain)하려 하고, 더 나아가 무기력해 우울(depress)에 빠지게 돼 결국은 죽음을 인정한다(accept)는 심리단계다.

최근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현장에는 애도와 침체 분위기가 장기화되고 있다. 집단 우울상태를 예방하는 어느 모임에서 전문가들이 여러 방안을 제안했다. 한 정신건강 전문의는 사고로 충격을 받은 학생들을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라며 이제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일을 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그 제안에 동감하는 바다. 인간은 누구나 넘어졌다 일어설 수 있는 ‘회복 탄력성’을 갖고 있음으로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음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이 길러지는 것이다.

많은 국민이 일련의 참사로 정신적인 ‘우울’에 빠져 있다. 조금이나마 우울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외출 운동’, 즉 탁 트인 넓은 운동장을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관전하는 야구경기도 한 가지가 될 것이다.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교수>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