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발리제이션’ 소고(小考)
‘울발리제이션’ 소고(小考)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5.2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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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동포들이 한국에 정착하면서 겪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가 외래어 간판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태어나 여태껏 살아온 사람도 ‘헤어샵’이 ‘미장원’임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북에서 온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는가.

텔레콤, 뱅크, 컨설팅 등 무의식으로 사용되는 외래어가 우리 주변에 너무 흔하다. 이런 현상은 연예계, 문화·예술계 쪽으로 가면 더욱 두드러진다. 젊은 가수, 탤런트, 배우들은 상당수가 그들의 이름을 외래어 그대로 표기하거나 모방해서 사용하고 있다. 한때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서태지란 가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본명이 아니라 stage(무대)란 영어를 발음 나는 대로 원용해 사용한 것이란 사실을 모르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문제는 이런 추세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은 노래가사 뿐만 아니라 연속극, 일상생활 용어에까지 외래어가 깊숙이 침투해 자칫 이를 못 알아들으면 외계인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물론 해당용어를 우리말로 정확히 표현할 방법이 없어 외국어를 그대로 인용하는 경우도 없진 않다. 자동차 ‘엔진’이라든지 ‘휠’같은 말은 딱히 우리말로 옮길 수가 없다.

하지만 과시욕 때문에 외래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외래어를 사용해야 뭔가 격이 있어 보이고 차별화 될 것이란 착각 때문에 이런 풍조에 젖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내가 미국유학을 하고 있을 당시 이런 ‘시어리(theory; 이론)’가 지배적이었어요”라는 식이다. 미국에서 공부를 했으니 영어 한 두 마디 쯤은 사용해야 제격이라고 생각해서다.

요즘은 공식용어까지 외래어로 표기하는 일이 많아졌다. ‘원스톱 고객만족’, ‘울산시 인센티브’, ‘태스크 포스팀 구성’, ‘지역 R&D 역량강화’, ‘하수관거 BTL’등이다. 이런 용어는 어느 정도 외국어에 익숙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이다. 또 알아듣는다 해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쩌면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사람조차 용어를 정확히 모를 수 있다.

4·19 의거 직후 ‘이화여자대학교’를 ‘배꽃 계집 큰 배움집’으로 고쳐 쓴 적이 있다. 한문에 능했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 감정적이고 순리에 맞지 않는 ‘우리말 쓰기’란 비판이 나중에 나왔다. 언어를 정치적으로, 감정적으로 다뤘기 때문에 봉우리를 맺을수 있었던 순 우리말 쓰기가 싹부터 잘려나간 실 예다.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회의가 부산에서 열렸을 때 회의장 이름을 ‘누리 마루’라고 했다. ‘누리’는 ‘세상’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이다. ‘마루’는 ‘꼭대기’를 뜻한다. 산꼭대기를 ‘산마루’라고 하는 데서 그 어원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두 어원을 합치면 ‘누리 마루’는 ‘세상의 꼭대기’란 말이 된다. 얼마나 아름다운 우리말인가.

울산시가 ‘울발리제이션’이란 용어를 가끔 쓴다. 세계화를 뜻하는 ‘글로발리이제이션’에다 울산의 ‘울’자를 앞에 붙여 조립한 모양이다. 하지만 이 말을 공적인 용어로 인용했을 때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시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발음에 조차 어려움을 겪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6·4지방 선거에 나선 사람들마다 하는 말이 ‘시민들에게 다가 가겠다’이다. 시민들이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하기도 어려운 용어를 그대로 쓰면서 ‘다가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6·4지방선거가 끝나면 새로운 시장이 취임한다. 신임 시장이 ‘배꽃 계집 큰 배움집’은 아니더라도 ‘누리 마루’정도로 고쳐 보는 건 어떨까.

<정종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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