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파일 석남사 계곡에 서서
초파일 석남사 계곡에 서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5.08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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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숙취로 속이 쓰려 아침 일찍 순대국밥집을 찾았다.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8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한 어른의 손을 끌고 문 안으로 들어왔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남루한 옷차림의 그들을 보고 주인이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이렇게 손님도 없는데 다음에 와요.”

그러자 소녀는 장님인 어른을 끌고 식당 중간쯤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선 “여기 순대 두그릇만 주세요”라고 했다. 그제야 식사를 하러온 줄 알고선 주인이 손가락으로 그 아이를 불렀다. 그리고 “얘야, 그 자리는 예약이 돼 있다. 다른 곳으로 가 보렴”이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소녀가 시무룩한 얼굴로 “오늘이 아빠 생일이거든요. 얼른 먹고 나갈게요. 그리고 돈은 있어요” 라며 꼬깃꼬깃 접은 천원짜리 몇 장과 동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주인이 “그럼 얼른 먹고 나가렴”이라고 했다. 그 아이 아빠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선지국 두 그릇이 배달됐다. 아이는 “아빠 내가 소금 넣어 줄게” 하며 자기 그릇에 있는 고기를 골라 모두 아빠그릇에 넣어 주었다. “아빠 얼른 먹고 나가야 돼. 어서 많이 먹어” 이 모습을 바라보던 주인의 표정이 머슥해졌다. 나는 식사를 끝내고 나오며 그들의 식대(食貸)를 몰래 내 주고 나왔다.

초파일에 석남사를 찾았다. 울창한 나무와 숲 사이로 난 긴 도로엔 오색 연등이 걸려 있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 걸음을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노부모를 양쪽에서 모시고 부축하며 걸어가는 가족들도 있었다. 또 젊은 연인들과 중년 부부들 그리고 많은 불자들과 관광객들로 경내가 넘쳐흘렀다.

하얀 불두화가 기품 있게 피어있는 도의국사 부도탑 정원 돌 벤치위에 앉아 선불교를 최초로 신라에 도입한 도의국사를 생각했다. 그는 이곳에 사찰을 세우고 새로운 선종의 종지를 전파하려고 했다. 하지만 교종우위의 기성세력에 밀려 뜻을 펴지 못하고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양양 진전사로 옮겨가 경전보다 참선수행을 중시하는 선종을 폈다.

그리고 이곳에 오랫동안 기거했던 불필스님과 그의 어머니도 생각했다.

남편인 성철스님이 어느날 돌연 출가를 해버리고 맏딸마저 병사한 뒤 마지막 희망으로 애지중지 길렀던 남은 딸마저 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어느 날 출가해 버렸다. 그 어머니의 빈 가슴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 남는다.

지난 4월 차디찬 바다 속에 사랑하는 자녀들을 묻은 뒤 평생 가슴속에 그 아이를 품고 살아야 할 어머니들의 가슴 또한 이와 별반 다를게 없다. 선실에 물이 차오르자 “나중에 메세지를 보낼 수 없을지도 몰라. 엄마 사랑해”란 문자를 보내고 이 세상을 떠난 그 아이들을 부모가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이런 인연이란 무엇인가. 또 스님들은 어떻게 그 인연을 쉬이 끊을 수 있는가. 가족들이 한집에 살고 있다는 것, 그들이 무탈하다는 것, 부모가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동안 이 나라 곳곳에 누적된 부정과 적폐가 곪을 대로 곪다가 마침내 터진 이번 참사로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며 밤을 새우고 있을 대통령을 향해 “모두가 당신의 잘못이니 사과하라. 물러나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위정자를 욕하기 전에 이번 기회를 국민성 대각성의 기회로, 국가 위기관리 재정립의 기회로 삼아 이 땅의 아이들이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고 맑고 싱그러운 5월의 산사 같은, 저 불두꽃 같은 계곡을 흘러내리는 맑은 물 같이 청정한 세상이 된다면 좋으련만.

눈먼 아버지의 국그릇에 자기그릇의 고기를 넣어주던 그 어린 딸이 예쁜 옷을 입고 맘껏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넉넉한 세상이 온다면 더 없이 좋으련만.

<김용언 김소아과 원장·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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