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이 자리
지금 이 순간 이 자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4.07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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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타고 오랜만에 서울로 외출한다. 역주변의 날씨는 아침이라 약간 찬 듯하지만 공기는 청아하기만 하다. 말 그대로 천고마비의 가을철 같이 하늘은 매우 깨끗하고 높아 보인다. 필자가 사는 울산은 이젠 옛날 공해 도시가 아니다.

‘울산(蔚山)’이라는 한자에서 나타나듯 울창한 산림이 우거져 나무들이 잘 자라는 동네라는 뜻에 잘 어울린다. 그런지 정말 나무에서 품어내는 냄새 또한 청량하기 그지없다. 바야흐로 세계적인 생태도시로 탈바꿈해가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서울까지 다섯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 그러나 이젠 KTX로 2시간여밖에 걸리지 않는 초스피드 시대에 살고 있으니 ‘행복한’외출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호는 ‘행복’이다. ‘행복’이라는 말의 의미는 ‘복된 좋은 운수’ 그리고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분을 느끼어 흐뭇함’에 이르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고명한 선지식 무소유의 ‘법정’(法頂)은 평상시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법문하고 있다.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에 이룰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이다 /과거를 묻지 말라, 이미 지나간 세월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곳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이다.(‘一期一’ 중에서)

이처럼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좀 더 보태어 이야기하자.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 있는가? 이것에 대한 질문에 답한 사람이 또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현대 독일의 대표적인 언론가 ‘볼프 슈나이더’(Wolf Schneid er·1925-)이다.

자신의 행복에 관한 사색을 정리한 그의 저서 ‘진정한 행복’에서 답하고 있어 동감이 간다. 즉 행복은, 기필코 달성해야 할 목표로 생각해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단칼에 행복해질 수 있는 처방은 없고, 사소한 인생의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삶에 주어진 고통과 두려움을 담대하게 수용하고, 이상향으로서의 행복이 아니라 ‘행복의 현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몇 년 전 영국의 한 유명 신문사가 현상 모집한 일이 있다.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가’ 라는 질문이다. 그 몇 개의 답을 보면 이렇다. 최고상은 모래성을 쌓고 있는 어린아이다. 2등은 하루의 집안일을 마치고 아기를 목욕시키는 엄마, 3등은 성공적인 수술을 마치고 만족하는 외과의사, 다음은 작품 완성을 바로 앞두고 콧노래를 흥얼대는 예술가가 뽑혔다.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고 있는 어린아이는 그야말로 무심하다. 모래로 귀여운 토끼를 만들어 보고, 또 착한 자기 엄마의 동그란 얼굴을 쌓아보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그 모래성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이는 모를 것이다. 그런데도 그 아이는 오로지 모래를 쌓는 그 자체가 좋아서 거기에만 집중한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 아닐까?

외과의사도 환자의 수술에만 몰두할 텐데 욕심이라고는 그야말로 티끌만큼도 없다. 음악가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선율을 창작하면서, 혼신의 영감으로 오선지에 음표를 하나하나 그려 넣을 것이다. 완성되고 있을 즈음 그는 극도의 쾌감, 아니 지상 최대의 행복감에 젖을 것이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도, 아기엄마도, 그리고 의사, 작곡가도, 욕심 따위는 전혀 없다. 그들은 한순간 한순간 즐거움을 느끼면서 이 세상 누구보다도 지금 이 시간이 가장 행복함을 느끼는 것이다.

산과 들에는 이제 파릇파릇한 생명들이 피어나는 희망찬 계절이다. 올 한해도 모두 욕심 없고 ‘행복’이 가득 찬 하루하루가 되기를 기원한다.

<김원호 울산대 국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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