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 스님이 그리운 이유
효봉 스님이 그리운 이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4.03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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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에게 선고한 벌금 254억원에서 비롯된 ‘5억 원짜리 하루 일당’의 관련 보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당시 광주지방법원장이었던 장병우 판사의 어처구니없는 판결에 대한 국민의 분노 또한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판사의 권한을 과시라도 하듯 판결한 ‘5억원의 일당’에 대해 국민들은 작심하고 봐준 판결이라며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판사가 지역이나 인맥, 학맥에 좌우돼 내린 판결은 법의 정신을 갉아먹는 행위이다.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킨 향판(鄕判ㆍ지역법관)의 어처구니없는 이번 판결은 양형(量刑)의 균형을 깨뜨리지 않는 것이 법관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우리는 종종 법관의 판결이 나라를 술렁이게 할 만큼 충격적인 파장을 몰고 오는 경우를 접한다. 물론 법관도 신이 아니기에 모든 판결이 완벽할 수는 없다. 하지만 법조계는 물론 일반 국민들까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판결이 내려질 때마다 법관의 양심에 대해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어떠한 법률적 해명에도 불구하고 설득력 없는 판결로 나라가 술렁일 때마다 필자는 ‘민족적 양심’ 앞에서 고뇌했던 ‘효봉(曉峰) 스님’을 떠올리곤 한다. 비록 시대적 상황은 지금과 판이했지만 적어도 ‘법관의 양심’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 효봉 스님. 그의 삶을, 이런 시점에서 기꺼이 되돌아보며 반성의 거울로 삼는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가 있을 것이다.

효봉 스님은 1888년 5월 28일 평남 양덕에서 5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했던 그는 한학에 이어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평양고보를 졸업한 뒤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그 뒤 10년간은 서울과 함흥에서 지방법원 및 고등법원 판사를 지냈다.

그런데 판사로 지내던 어느 날, 그의 삶을 바꾼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일제강점기였던 그 무렵,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동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된 것이다. 조선인 판사 이찬형(李燦亨·속명)은 억누를 수 없는 ‘민족적 양심’의 가책 앞에서 걷잡을 수 없는 갈등에 휩싸이게 된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그는 판사직을 버린 채 가출했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미련 없이 집을 떠나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입고 나온 옷을 팔아 엿판 하나를 사고 이후 3년 동안 엿판을 낀 채 팔도강산을 떠돌았다. 고난은 스스로 선택한 참회의 길이었다.

정처 없이 떠돌던 그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석두스님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했다. 그때 나이가 서른여덟살. 다른 스님들에 비해 많은 나이였다. 때문에 더욱 수련과 정진에 힘을 다해야 했다. 이 때문에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생겼다. 밤에도 눕지 않고 앉은 채 수행했으며, 한 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일 줄 모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출가 후 5년이 지나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그는 ‘깨닫기 전에는 죽어도 나오지 않겠다’는 각오를 한 뒤 1년 6개월간 금강산 법기암 뒤 토굴에 흙벽을 만들고 들어가 정진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정진이었다.

이후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구산 스님, 법정 스님 등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그중 대표적인 제자가 바로 법정 스님이다. 법정 스님의 가르침 ‘무소유’ 또한 효봉 스님의 절약하는 모습과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한국불교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며,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민족적 양심’ 앞에서 고뇌를 거듭하며 괴로워했던 큰 스님 ‘효봉’. 그의 높고 넓은 자취가 더욱 그리워지는 오늘이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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