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춘소회(迎春所懷)
영춘소회(迎春所懷)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4.01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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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낮이었습니다. 나이 탓인지 아침잠이 줄어 일요일인데도 일찍 눈을 떴습니다. 거실에 앉아 창밖으로 집 앞 강물과 산을 바라봤습니다. 여기는 태화강 중상류쯤에 해당되는 반천입니다. 어제 내린 넉넉한 봄비 덕에 싱그러운 봄기운이 완연해진 모습입니다. 강 건너 산등성이 위로 햇살이 눈부십니다.

군데군데 밤나무와 아카시아는 아직 깡마르고 헐벗은 모습이지만 따뜻한 봄 햇살 사이로 소나무 잎은 벌써 생기를 더하고, 갖가지 나뭇가지 끝엔 어슴푸레 연두색 봄빛이 선명하고 칡덤불 사이로는 연분홍 진달래 빛이 어렴풋이 비치고 있습니다.

강물은 맑아져 얕은 강바닥이 멀리서도 훤히 들여다보입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고 없는 낚싯대 몇 개가 긴 줄을 드리우고 세월을 셈하고 있습니다. 계절을 잠시 잊었는지 오리 몇 쌍이 한가로이 자맥질하며 봄날을 즐기고 있습니다.

창 너머로 봄을 느끼기엔 성에 차지 않아 옷을 챙겨 입고 강으로 내려갑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귀밑 볼을 스치는 봄바람에 기분이 절로 좋아집니다. 때맞춰 정원에서 여러 새소리가 들리고 지다 남은 빛바랜 산수유 꽃송이 바람에 날립니다. 그 곁으로 모과나무 가지에는 여린 새순이 제법 반질반질하게 자태를 드러내고 있고, 이미 살구꽃은 피었다 대부분 지고 없는데 지다 남은 몇 송이 꽃잎이 물방울을 머금고 있습니다. 살구꽃만 보면 생각납니다.

이호우 시인의 시조 한 구절입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몇 걸음 나아가 둑으로 내려가는 길가에 벚나무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올해에는 유달리 따뜻한 날씨 탓인지 여느 해보다 일찍 꽃망울을 터뜨렸습니다. 먼저 핀 꽃잎 중에는 간밤에 내린 비에 제대로 자태를 뽐내지도 못하고 아쉽게도 길 위에 떨어져 밟히고 있습니다. 둑 아래로 내려서니 풀 이슬에 바짓가랑이가 젖고, 부드러운 강모래가 신발에 달라붙어도 그게 싫지는 않습니다. 마른 갈대숲 속에서는 군데군데 쑥들이 그야말로 쑥쑥 자라고 있습니다.

여느 봄에는 아내랑 강가에 내려와 쑥을 캐어서 도다리 쑥국을 끓여먹고, 쑥떡을 해서 먹곤 했는데 근자에는 무릎이 성치 않다고 쑥 캐러 내려오지도 못했습니다. 흰 왜가리인지 백로인지 모를 한 녀석이 물을 바라보며 서성이는데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고기 한 마리가 제 딴에도 봄기운을 못 이기는지 벌떡 물 위로 솟구쳤다 사라집니다. 그 자리에 순간 수십개의 동심원이 퍼져나가며 물결을 만듭니다.

참으로 평화로운 순간입니다. 눈과 코로 귀로 그리고 볼의 촉감으로 봄을 만끽합니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저런 잡다한 일들을 잠시 놓아버리고 이 순간 이 자리에 이렇게 봄을 느낄 수 있음이 얼마나 고맙고 즐거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누추한 집이긴 해도 여기 있어서 좋고, 자연이 준 저 넓은 정원과 연못에서 이렇게 계절을 느낄 수 있어 더욱 좋습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긴 하지만 산천에 울긋불긋 꽃이 피고, 꽃이 지고 나면 연두색 새잎이 나고 그것이 짙어져 가는 초록 빛깔 세상을 느낄 수 있어 감사하게 여깁니다. 가끔 번잡한 세상사가 무겁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런 때에는 내 앞에 남은 봄은 몇 번이나 더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못내 아쉬워 이 계절을 무덤덤하게 그냥 보낼 수가 없습니다.

헤어진 옛사랑은 돌아올 수 없어 더 애틋하고 그래서 더 아름답게 각인되듯이 이 봄은 이 봄으로서는 단 한번이지요. 다시 오지 않는 이 봄을 온 몸으로 속속들이 느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김홍길 신언중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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