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 단상(斷想)
강변 단상(斷想)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3.31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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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주군 두서면 백운산 탑골샘 발원지에서 백리물길(47.54㎞)을 달려온 태화강. 십리 대밭교를 지나 용금소에 이르러 수심이 깊어지면서 흐름을 멈춘 듯 유유히 태화교를 지나 울산교, 번영교를 거치면 강은 호수처럼 넓고 평화로운 수면을 연출한다.

아침 출근길 강을 따라 걷는다. 고개를 들어 멀리 무룡산에 떠오른 태양, 그 찬란한 햇살을 품에 가득 안고 씩씩하게 걷는다. 퇴근길에는 강을 거슬러 멀리 문수산 일몰의 화려한 빛깔을 가슴에 물들이며 여유있게 걷는다. 태화교 밑에 이르면 노을이 진다. 단순한 일상이지만 무한한 사색의 나래를 펴 수 있어 필자는 태화강 산책을 즐긴다.

이 강에 진객(珍客)이 있다. 바로 청둥 오리떼다. 매년 11월 겨울과 함께 떼 지어 날아와 강변 갈대숲에 둥지를 틀고 겨울을 난다. 갈대숲이 한겨울 강추위 칼바람을 피하기에 너무도 부실하고 엉성하지만 둥지를 틀고 부화한 지 얼마 안 되는 새끼들과 함께 서로의 체온으로 긴 겨울밤을 견딘다. 이른 아침잠에서 깨어 차가운 강바람에 새끼들을 호위한채, 미끄러지듯 물살을 가르며 강 가운데 이르러 먹이를 찾는 청둥오리들의 모습은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겨울 강의 서정(抒情)이다.

그런데 3월 말 어느 날. 그들은 거짓말처럼 일시에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말이다. 긴 겨울을 보낸 정든 강을 떠나 머나먼 북쪽 겨울 강을 찾아서 떠난 것이다. 오늘도 태화강은 흐르는데 그들은 갈대숲 어디에도 깃털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봄마저 두고 떠났다. 봄기운이 완연해지면서 태화강변의 밤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이어진다. 연인들은 사랑을 속삭인다. 별빛 쏟아지는 강 수면은 연인들과 잘 어울리는 사랑의 소나타다.

낭만의 밤이 지나고 어김없이 떠오르는 아침 해가 찬란하게 비추는 강변은 어수선하게 망가져 있다. 불과 수시간 머물다 간 인간은 저렇게 쓰레기로 흔적을 남기다니, 연인들이 남긴 사랑의 흔적은 쓰레기일 수밖에 없단 말인가?

파릇한 새싹이 막 돋아나는 강둑에 난마처럼 흩어진 사랑의 잔해들. 5개월여를 살다 간 청둥오리는 깃털 한 개 빠뜨리지 않고 말끔하게 살던 곳을 두고 소리 없이 떠났는데, 하루도 머물지 않고 간 인간의 공간은 그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로 어지럽혀져 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행태를 미미한 날짐승인 청둥오리와 견줘 굳이 청탁(淸濁)을 비교해야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음 사람을 위해 자신이 머물다 간 자리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청둥오리는 정리된 자리를 남기고 떠났는데 뒤에 온 인간은 그 정연(整然)한 자리에서 즐기다 쓰레기를 선물처럼 남기고 떠났다. 다음에 오는 사람 역시 똑같은 선물을 남길 것이다. 이런 악순환은 아침 태양을 가슴에 안고 힘차게 강물 따라 걸어가는 필자를 슬프게 한다.

청둥오리가 살다 떠난 태화강. 이 맑고 투명한 강변의 지순(至純)한 자연을 바르지 못한 인간의 손길들이 깨트리고 있으니…. 태화강의 자연환경은 우리들 것만이 아니다. 조상들로부터 빌려온 것이니 맑고 푸르고 아름답게 가꾸어진 강으로 후손에게 다시 돌려줘야 한다.

자연에서 이탈하는 것은 곧 행복에서 이탈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연은 모든 종류의 생물에게 자기 보존의 본능을 부여했다’라는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말은 자연이 있기에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있음을 엄숙히 선언한 것이다. 태화강의 자연은 봄이 온 것을 알고 벌써 겨울잠에서 깨어 만물이 소생하는 희망을 가득 품고 더욱 푸르게 흐르고 있다.

<이영조 상이군경회 중구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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