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기도
소녀의 기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2.27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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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소녀의 기도’ 시사회에 참석했다. 권순도 감독이 제작과 연출을 맡은 이 영화는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다큐멘터리로 일본 시마네현이 주최하는 ‘다케시마의 날’ 행사 하루 전에 상영됐다.

41분 분량의 ‘소녀의 기도’에는 유관순 열사의 삶과 3·1 운동 발발 배경 및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유관순 열사의 친구들이 생존해 있을 때 그의 일상에 대해 증언하는 모습과 조카며느리인 김정애씨 증언도 생생하게 보여줬다. 특히 유관순 열사와 함께 감옥에서 생활을 했던 스승 박인덕 선생의 육성증언도 눈길을 끌었다. 이날 권 감독은 “유관순 열사를 다룬 책은 100여종 출간돼 있지만, 영상은 TV에서 단편적으로 잠깐씩 다루거나 UCC 형식의 5분 내외 영상 밖에 없다”며 다큐멘터리로 정식 정리된 것은 이 작품이 최초라고 했다.

근래에 한국사 교과서 서술 내용을 둘러싼 불협화음의 후유증이 채 가라앉지 않은 터라 관람하는 내내 나의 심정은 그저 착잡하기만 했다. 특히 일부 교과서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언급 자체가 아예 누락된 사실이 드러난 바 있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가누며 시사회장을 나서야 했다.

그곳을 빠져 나온 나는 유관순 열사가 겪은 처참한 고초를 조금이나마 마음속에 담아 볼 요량으로 오랜만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 내에 있는 이곳은 대한제국 말기에 지어져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감금되고 고문당한 쓰라린 역사를 안고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정권과 해방 이후 독재정권이 그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서대문형무소’라는 감옥을 어떻게 이용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유적이자 박물관이다.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일제 형무관을 양성하는 장소로 쓰이기도 한 ‘서대문형무소’는 18세미만 소녀들을 모두 감금했으므로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 갇혔던 것이다.

이곳에서 유관순 열사는 가혹한 취조와 옥고를 치르면서도 끝끝내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내 나라 독립을 부르짖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되는가. 국권을 침탈한 일본이 어떻게 나를 심판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라고 맞섰다. 형무소에서도 틈만 나면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3·1운동 1주년이 되는 해에는 형무소 전체의 만세운동까지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심한 고문을 당해 방광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으나 그는 만세를 멈추지 않았다. 배를 밟는 단순 구타가 아닌 잔인한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1920년 10월 12일 서대문형무소에서 17세 꽃다운 나이의 유관순 열사는 모진 고문과 영양실조, 그리고 굶주림으로 이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처음에는 유관순 열사의 시신을 내주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이화학당의 교장 미스 프라이와 교사 미스 월터가 일본인 형무소 소장에게, 국제사회에 만행을 알리겠다는 협박을 하며 시신을 내놓으라고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 끈질긴 항의 끝에 시신 상태를 세상에 알리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 다음에야 시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열사의 시신은 얼굴이나 몸통, 어디 성한 데가 한 곳도 없이 처참하게 훼손돼 보는 이들의 통곡을 자아냈다.

서슬이 시퍼렇던 일제강점기. 바로 그 암울했던 시절에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유관순 열사. ‘대한독립 만세’의 뜨거운 함성이 우렁차게 울려 퍼졌던 그 3월을 다시 맞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가슴 절절한 유언을 다시금 되새겨 본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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