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눈 오는 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2.16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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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니 눈은 아직도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게다가 보는 이의 마음까지 넉넉해지는 함박눈이었다. 울산은 눈이 내려 봤자 금방 녹아버리는 일이 다반사가 아니었던가. 두껍게 쌓이는 눈도 신기했지만 오랜 시간 그치지 않고 계속 쏟아지고 있는 풍경도 마냥 놀랍기만 했다.

함박눈이 주변의 잡다한 소리를 모두 흡수한 때문인지 사위가 물속인 듯 고요 속에 잠겨들고 있었다. 말없이 그 모양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동요 한 구절이 흘러 나왔다.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이런저런 추억들이 하나씩 둘씩 떠올랐다.

어쩌면 그 추억이라는 것도 스스로 가꾸고 색깔을 입힌 참으로 주관적이기 짝이 없는 혼자만의 보물이겠지만 그래도 추억의 책갈피를 뒤적이는 일은 늘 알 수 없는 서러움이 뒤섞인 아련한 그리움을 동반한다.

그런 추억들 속에서는 언제나 잊혀 지지 않는 노래가 함께 따라 나온다. 아마 초등학교 4학년쯤이었을까. 때는 작은 설날이었다. 집집마다 명절 음식을 만드느라 굽고 지지는 음식 냄새가 담장을 넘고,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목소리에도 과도한 흥겨움이 묻어났다. 여러 가지 맛있는 설음식들 중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음식이 바로 떡국이었다.

그런데 할머니를 따라서 이웃 동네에 있는 떡 방앗간까지 불린 쌀을 머리에 이고 가는 일은 좋으면서도 고역스러웠다. 작은 설 전날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발목이 푹푹 빠질 정도로 쌓여가고 있었다. 눈길에 행여 미끄러질 새라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던 중, 어디선가 들려오는 애절한 선율에 두 뒤가 쫑긋해졌다.

“눈이 내리네~~ 당신이 가버린 지금~ 눈이 내리네~ 외로워진 이마음~…”

가슴 밑바닥 까지 파고드는 애틋한 선율은 제대로 의미도 모르는 소녀의 마음을 온통 휘저어 놓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는 아직도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이면 찰랑거리는 시냇물소리를 내며 나를 깨우곤 한다.

그 때만 해도 겨울이 되면 소담스런 눈이 참 많이도 왔었다. 보통 한 겨울을 보내는 동안 서너 번씩 내리는 눈은 어른들의 걱정과는 반대로 아이들의 즐거움을 한껏 부추기곤 했다. 옷이 젖어도 추운 줄도 모르고 빨갛게 언 손가락을 호호 불어가며 눈덩이를 뭉치고 굴려 눈사람을 만드는 일에 신명을 내곤 했는데, 가장 어려운 부분은 마무리 단계에서 눈사람의 코와 눈썹을 안 떨어지게 붙이는 일이었다. 밤이 돼 윙윙 소리를 내며 울어대는 바람소리에 혹시 눈사람이 무서워 떨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하얀 순백의 눈은 어른의 마음은 천진한 아이의 마음으로, 아이의 마음은 한층 어엿한 어른스런 마음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쌓이고 쌓인 눈 무게를 못이긴 나뭇가지가 우지직 뚝뚝 소리를 낸다. 차들이 굼벵이 걸음으로 차도가 꽉 막혀 있다.

흰 눈은 어른도 아이도 강아지도 모두모두 바깥으로 불러낸다. 나도 우산을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정말 얌전히 방 안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무엇이 자꾸만 나를 밖으로 끌어당긴다. 푸른 소나무에 쌓인 흰 눈 위에 부지런히 셔터를 눌러댄다. 흰색과 초록색의 조화가 그야말로 환상이다. 그 순간들이 무척이나 행복하고 황홀하다. 보고 또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는 순백의 세상.

아직도 눈은 소리 없이 내리고 내려서 쌓이고 있다.

<전해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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