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歸省)의 추억
귀성(歸省)의 추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1.28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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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부터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는 설날 연휴에 들어간다. 설날은 한해가 시작되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원단(元鍛)·세수(歲首)·원일(元日)·신원(新元)·정초(正初)라고도 부른다. 설이라는 말은 ‘사린다’, ‘사간다’에서 온 말로 ‘조심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또 ‘섧다’는 말로 ‘슬프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설이란 그저 기쁜 날이라기보다 한 해가 시작된다는 뜻에서 모든 일에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딛는 매우 뜻 깊은 명절로 여겨져 왔다.

필자도 오래 전 선친이 살아 계셨던 이맘때쯤엔 귀성을 앞둔 설렘에 들뜨곤 했다. 명절은, 삭막하고 팍팍한 서울생활을 잠시 벗어나 부모님이나 친지들과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1980년대 초, 서울 생활을 시작한 필자는 90년대 후반까지 해마다 명절이면 귀성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 무렵엔 열차표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으므로 주로 고속버스를 이용했는데 장시간 기다려 표를 구하는 과정부터가 그리 수월치 않았다. 고속터미널 대합실 차가운 바닥에 장시간 쭈그리고 앉아 차례를 기다리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오랜 기다림. 그리고 드디어 차례가 돌아와 귀성티켓을 거머쥐었을 때의 기분은 날아갈 듯 하였다.

그러나 그 쾌감도, 머지않아 닥치는 귀성길에서의 교통체증으로 금세 달아나고 말았다. 요즘은 도로사정이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으나 그 무렵만 해도 교통체증은 몸서리칠 정도였다. 울산까지의 소요시간이 10시간 이상은 기본이었고 어떤 때에는 22시간이나 걸린 적도 있었으니 이른바 ‘교통’이 아닌 ‘고통’이었다. 오고 가는 데 많은 시간을 빼앗기니 고향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넉넉지 않았다. 차례를 지내고 서둘러 집안 어른들 찾아 뵌 뒤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귀경하면 다음날은 이내 출근전쟁터로 내몰려야 했다.

아내는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경상도 신랑을 만난 죄(?)로 신혼의 달콤함도 잠시, 명절 때면 젖먹이 안고 귀성버스에 올라 열 시간 이상 갇힌 채 분유 타 먹이랴 기저귀 갈아 채우랴 분주했다. 거기에다 보온병에 담아 간 온수가 떨어져 분유를 탈 수 없게 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배고픈 아기가 울어 대기 시작하면 통로에 서서 아기를 안은 채 달래고 어르며 진땀을 빼야 했다.

피로에 지친 몸을 이끌고 시댁에 닿으면 어른들께 인사 끝나기가 무섭게 옷 갈아입고 부엌으로 직행, 차례상에 올릴 제물(祭物) 준비로 바삐 움직여야 했으니 그 무렵 아내의 고충이 새삼 헤아려진다. 요즘은 지방에 거주하는 단출한 노부모가 서울로 역귀성하는 경우도 꽤 늘었다고 하니 세월 따라 명절을 지내는 모습도 차츰 변화해 감을 느낀다.

필자는 16년 전 선친이 돌아가시자 제사를 서울로 모셔 왔으므로 그때부터는 귀성 전쟁과 멀어졌다. 해마다 명절이면 직장 동료나 친지가 겪는 귀성의 기쁨과 고달픔을 엿보며 옛 추억에만 젖을 뿐이다. 다소 몸은 힘들었으나 명절이면 고향으로 향한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던 그 시절은 다시 올 수 없는 시간으로 멀어져 간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 법원통계를 보면 한국인의 이혼 소송이 명절을 지낸 이후 급격히 증가한다고 한다. 여러 원인이 있겠으나 먼 거리를 오가는 귀성과 귀경으로 인한 짜증과 불편함이 신세대 부부 간의 다툼으로까지 번져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분석도 있다. 미풍양속도 좋고 고유한 전통도 좋지만 그것이 혹, 불미스러운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면 우리의 생활양식을 차분하고 냉정하게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훌륭하다고 떠받드는 제도나 관습도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면 예상치 못한 불협화음을 자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설날도 평소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한곳에 모여 서로 ‘덕담’을 주고받으며, 가정의 화목을 더욱 도탑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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