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웠던 날들의 보상
그리웠던 날들의 보상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1.2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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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큰 명절 ‘설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해마다 이맘 때면 나를 비롯해 객지에서 뿌리내린 사람들은 더욱 짙은 향수(鄕愁)에 젖어 들게 된다. 그나마 고향을 찾는 귀성객이야 가족·친지들과 회포를 풀 수 있다지만, 이미 부모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경우 대부분 객지에서 차례를 지내며 쓸쓸한 망향가를 읊조려야 하니 마냥 허전하기만 할 것이다.

나 또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신 뒤 고향 울산에서 지내던 제사를 서울로 모셔오면서 고향을 향한 발걸음이 뜸해진지도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지난해부터는 상경하신 어머니와 명절을 함께 보낼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 감출 수가 없다. 그러나 객지에 둥지를 튼 뒤 오늘이 있기까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마감하는 데에는 자잘한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16년 전 아버지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신 뒤 홀로 남으신 어머니는 고향집에서 오랜 시간의 고독, 그리고 육체적 불편함을 잘 견뎌내셨다. 우울증 초기증세가 나타나자 어머니는 서예에 몰두하시며 홀로서기의 슬기로움(?)도 보여주셨다. 그러나 오랜 세월, 진드기처럼 괴롭혀 온 퇴행성 관절염은 어머니의 홀로서기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았다. 40여년 전 형님이 돌아가신 뒤 외아들로 살아온 나는 아내와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하며 어머니를 모시는 문제로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우선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 오면 편안하게 거처하실 보금자리가 마땅치 않았다.

나의 아파트는 30평도 안 되는 소형인데 방이 3개라고는 하나 큰방은 나와 아내가, 나머지 작은 방 2개는 아들과 딸이 각자 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안방을 내 드리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시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게다가 아이들도 어려서부터 각자 자기 방에서 생활해온 패턴에 젖어 있어, 나의 고민은 더욱 깊어만 갔다.

더군다나 우리 집 사정을 잘 모르는 주위 사람들은 고향집을 처분한 뒤 그 돈을 보태 서울 아파트 평수를 늘리면 되지 무슨 고민을 하느냐고 했다. 하지만 고향집은 어머니의 소유가 아니었으므로 그 집을 처분해 어머니를 좀 더 편히 모신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울산에서 향토사학자로서의 외길만 고집했던 아버지는 돈과는 거리가 먼 일에만 몰두하신 나머지 내 집은 고사하고 땅 한 평 남기지 않으신 채 생을 마감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피해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제는 마땅히 어머니를 편히 모셔야 하는 자식의 도리를 실천할 때가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내와 머리를 맞댄 긴 고민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 고민 끝에 우리가 내린 결론은 바로 ‘거실’이었다. 딸아이가 출가해서 방 하나가 빌 때까지 어머니를 거실에서 주무시도록 하는 방법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책이었다고 하더라도 막상 결론을 내리고 나니 나의 마음은 그리 편치가 않았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를 편안히 모실 방 한 칸의 여유도 더 확보할 수 없는 처지를 생각하니 어머니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내린 결론, 우선 어머니에게 전화를 올려 염치없지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구구한 나의 사정을 조용히 듣고 나신 어머니는 하하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괜찮데이, 아무데서나 등만 따시믄 되지. 너무 걱정하지 마래이. 그라고 나는 인자, 느그하고 같이 사는 기 더 좋은 기라.”

그날, 어머니와의 통화가 끝나자 나의 눈시울이 차츰 붉어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 만에 뜨거운 눈물이 나의 볼을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그 뒤로 어머니를 모신지 어느덧 1년이 훌쩍 지났다. 어머니는 바로 그 ‘거실’에서 아직 감기 한 번 앓지 않으시며 늘 건강하고 즐겁게 지내고 계신다. 어머니와 떨어져 살았던, 오랜 그리움이 베푼 보상일까. 덕분에 나는 요즘, 삶에서 주어지는 가장 큰 축복을 어머니와 마음껏 누리고 있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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