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선생님이 생물을 가르쳤던 이야기
미술 선생님이 생물을 가르쳤던 이야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7.0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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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화가 이수원 화백
금년 81세이신 이수원 선생님을 울주군 온양읍 발리로 찾아갔다. 동강 박영철(동강의료재단 설립자)선생의 일대기를 본보에 연재하며 학성중학교에서 동강선생과 같이 근무했을 때의 일화를 취재하러 갔다가 뜻밖의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 첫째가 건빵학교 이야기이었다. 잊혀지고, 기록도 되어있지 않아 아쉬워하며 들려준 이야기이다. ‘돋보기’에 ‘울산토박이의 긍지, 건빵학교’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소개되었기에 다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둘째는 동강 선생이 의과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1953년에 중학교 3학년의 생물, ‘인체(人體)’를 가르쳤는데 동강 선생이 병원으로 떠나자 가르칠 교사가 없어 미술을 가르치던 이수원 선생님이 가르치게 되었다. 당시 정규 사범대학을 졸업한 교사는 아주 적었다. 지금의 인문계 고등학교(고등보통학교)만 졸업하였어도 소학교에서 준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중학교 교사는 더 구하기가 어려웠다. 이수원 선생님은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경주예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하였다. 그때 부산상고는 서울의 선린상고, 강경의 강경상고와 함께 전국의 수재들이 진학하던 곳이었다. 이수원 선생님이 상고를 졸업하고 은행에 실습을 갔는데 하루 종일 돈만 세면서 학교에서 배운 것은 실습에 들어가지도 않았었다. 어려서부터 미술에 빠져 있었는데 좋다고 하는 은행이 단순 노동이다, 이건 아니다고 생각하여 울산에서 가까운 경주예술학교로 진학하였다. 부모의 반대는 대단했지만 예술가로의 꿈을 막지는 못 하였다. 바로 이 예술학교에서 인체 해부학을 공부했기에 생물 시간에 ‘인체’를 가르칠 수 있었다. 지금도 미술대학에서는 인체 해부학을 공부한다. 당시의 생물은 1학년 때는 ‘식물’, 2학년 때는 ‘동물’ 3학년 때는 ‘인체’로 되어있었다. 제대로 된 교육과정(敎育課程)이 아직 개발되지 못 했던 시절이었다.

셋째는 지금도 스승의 날에 찾아오는 제자 김홍명 교수(전 울산대 교수) 이야기이다. 김홍명 교수가 중학교에 다닐 때,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렸는데 눈에 띄게 잘 그렸었다. 이수원 선생님이 칭찬을 해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김홍명 학생은 미술활동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 서울의 이화여고, 이화여대로 진학하여 대학의 교수로 발전하였다. 이것을 고맙게 여긴 김홍명 교수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수원 선생님을 찾는다. 올해도 방문하여 드리고 간 난(蘭)이 지금도 응접실에 있다.

넷째는 동강 선생이 학성여중에서 생물을 가르친 것은 지역사회에 대한 순수한 봉사활동이었음을 확인해준 이야기이다. 1950년대 울산의 중학교는 울산농고가 유일한 남학생을 위한 학교였다. 여학교가 없어서 울산 시민의 자율적 결정으로 세운 여학교인데 교사가 없음을 알고 ‘항상 웃는 얼굴’의 박영철 생물 선생님이 부임하신 것이다. 내 고장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당시의 얼마 안 되는 울산의 성인 남자들 모두가 쓰던 말을 들려주었다. ‘다바꼬 잇본 조다이’ 배경 설명은 필자와 만나 개별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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