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후퇴의 갈림길에서
개혁과 후퇴의 갈림길에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4.01.01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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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인 역사를 돌이켜 보면 흰 떡 켜와 붉은 팥고물의 켜가 다르듯이 역사의 시공은 영광과 질곡으로 점철돼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120년 전의 갑오년은 그야말로 역사의 시금석이었다.

1894년 갑오년은 한반도 역사에서 새롭고 굵은 한 획을 그은 시공이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제국주의가 ‘꿈속에 깊이 잠든 동양’으로 질풍노도처럼 밀려오던 때였고 조선왕조로 보면 부패와 쇠락이 목전에 당도해 있던 시기였다. 제 한목숨 부지하기도 어려워 탈향 걸식하며 산천을 유랑하는 민초들이 학정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 무리에 뜻을 일러 1894년 갑오년 벽두에 들불처럼 일어난 것이 바로 동학 농민혁명이다.

그러나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정부가 청군에게 파병을 요청하자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견제하고 나아가 조선을 침탈하려던 일본까지 개입해 결국 청일전쟁으로 비화됐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자 1895년 3월 일본은 청국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고 중국의 랴오뚱, 뤄쑨 할양과 3억엔의 배상금을 받았다. 또 일본은 청국으로부터 조선의 독립과 일본의 조선개입을 묵인 받는 과실까지 챙겼다.

그러나 갑오혁명이 결코 실패로 끝난 것은 아니다. 부패한 왕조의 쇄신과 개혁을 창의로 하여 일어섰던 갑오혁명은 우리 역사에 크나큰 방점을 찍고 있다. 미완의 혁명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주는 역사적 의미와 교훈은 길이 남아있다.

동학 농민혁명은 부패하고 부정한 정권에 저항하여 일어난 민중항쟁의 총체적 결정판이었다. 또 일본의 조선침탈이 본격화되는 구한 말, 항일 의병활동의 모태가 됐다. 전 근대적 중세 암흑에서 근대로 가는 여명을 여는 뜻 깊은 사건이었던 셈이다.

경장(更張)이란 느슨해진 거문고의 줄을 팽팽하게 새로 당겨(解絃更張) 제대로 연주하게 하는 줄 고르기를 의미한다. 돌아보면 역사의 위기가 감지되는 시점에서는 늘 경장이 요구되었다. 임진왜란 직전 율곡 이이의 ‘경장론’이나 일본 침략이 노골화되는 시점인 1894년 갑오경장 등이 그 한 예다. 위기를 앞둔 시점에서 감지되는 이런 의식은 우리에게 내재돼 있는 역사적 본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두 번의 갑(甲)이 지난 오늘 2014년 새 갑오년이 열렸다. 역사는 냉정하고 반복적이다. 또 아이러니의 연속이다. 당시의 농민을 오늘날의 노동자에 비유하면 최근의 철도노조나 민노총의 파업이 120여 년 전의 동학 농민전쟁쯤으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시대 배경과 일의 전말은 당시와 확연히 다르다. 당시는 민초들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였던 반면 지금은 자신들의 이익을 방어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약자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보듬어줄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옛 향수에 젖어 또 군국화를 꿈꾸고 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려 한다. 120년 전의 갑오년 위기가 새삼 느껴진다. ‘경장 개혁’이 절실하다. 대통령의 새해 화두가 ‘비정상을 정상으로’이다.

신 갑오개혁, 국민행복 경장의 의지가 드높다. 하지만 개혁의 성공은 천하의 준마가 붉은 땀을 쏟으며 견마지로를 다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함께하는 민초들의 북돋음이 더욱 소중하다. 갑오년, 끄는 청마와 미는 민초가 함께 경장 개혁의 각오를 새겼으면 더없는 복이겠다.

<박기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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