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례문의 아픔
숭례문의 아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1.21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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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은 1962년 12월 국보 1호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재다. 도성(都城) 여덟 개의 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정문이며 현존하는 국내 성문 건물로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조선왕조가 한양 천도 뒤인 1395년(태조4년) 한성 남쪽 목멱산(木覓山·남산)의 성곽과 만나는 곳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7년)에 완성했으며 이후 500년 동안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서울 사람들에게는 자부심의 대상이었고 지방 사람들에게는 한번 보고 가면 큰 자랑거리가 되는 소중한 문화재로 자리매김해 왔다.

그런데 2008년 2월 11일 저녁, 국보 1호 숭례문에 느닷없이 커다란 아픔이 닥쳤다.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은 충격적인 그날 일어났던 화재를 우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2006년에도 창경궁에 불을 질렀던 전과범의 어처구니없는 방화였다.

누각 위쪽에서 흰 연기로 일기 시작한 불길은 차츰 커져 자정 무렵엔 누각 2층을 완전히 뒤덮었다. 이윽고 지붕 뒷면이 붕괴되기 시작, 누각 2층과 1층 대부분이 무너졌다.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은 소방차 30여대와 소방관 130여명이 투입된 진화 작업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진전 없이 5시간 만에 숭례문을 붕괴시키고야 말았다. 한국의 상징인 숭례문이 모조리 타 버린 것이다. 그날, 시뻘건 화염에 휩싸인 채 무너져 내리던 서까래와 기왓장을 망연자실 바라만 보던 온 국민의 마음도 함께 무너져 내렸다.

불이 날 무렵의 숭례문은 화재에 취약한 목재 문화재임에도 불구하고 방화 등 돌발적인 화재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돼 온 것으로 나타났다. 숭례문에는 소화기 8대가 1, 2층에 나뉘어 비치되고, 상수도 소화전이 설치된 것이 소방시설의 전부였다.

그러나 화재가 난 뒤 문화재청은 숭례문을 되살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전통 재료와 방식을 사용해 잃어버린 기술의 맥까지 잇겠다고 선언했다. 화재 2년 만인 2010년 2월부터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진행한 뒤 242억원을 들여 복구에 들어갔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했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마침내 지난 5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준공식이 열렸다. 하지만 성대한 행사가 있은지 보름여가 지난 시점부터 단청의 훼손된 모습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부실 복구 논란이 불거졌다. 숭례문 부실 복구의 대표적 사례는 단청의 균열과 박락(剝落)이었다. 조사 결과 모두 81곳에서 단청 벗겨짐이 나타난 것으로 밝혀졌다. 기둥 갈라짐 현상도 숭례문 부실 복구의 사례로 꼽힌다. 2층 문루 기둥 4개 가운데 1개와 동남쪽 모퉁이 추녀, 서까래, 문루 입구 위쪽 개판(蓋板) 등이 완공 뒤부터 갈라짐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같은 숭례문 부실 복구에는 문화재 수리 기술자 자격증 불법 임대와 같은 절차적인 문제에도 원인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복원을 이제 겨우 반년 넘긴 숭례문이 졸속·부실 공사 논란에 휩싸인 것은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나랏일이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숭례문 보수는 국보 1호라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나라의 얼굴과 다름없는 숭례문이 소실된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인데 복구조차 엉망이니 한심할 따름이다. 이번 사건으로 상처 입은 국민의 문화적 자부심을 치유하려면 어지간한 조치로는 불가능할 것이다.

정부는 숭례문 복원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철저히 파악하고 장기적이고도 근본적인 개선책을 내놔야 한다. 이는 문화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우리 문화재를 후손들에게 제대로 물려주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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