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온기를 그리며
순수한 온기를 그리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1.20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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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 오랜 불안을 불러내는 호출장이다. 겨울의 문턱에 서면 쓸쓸하고 불안하다. 먼 동굴시대부터 피 속에 녹아있는 추위와 어둠에 대한 불안의 재생이다.

이럴 때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순수한 온기이다.

온기에도 순수한 것이 있는가.

그렇다. 낙엽을 태워 데운 황토구들이나 두엄이 부숙하며 내는 열기는 순수하다. 비닐찌꺼기를 태운 열기나 세슘처럼 세상에 없던 물질을 생성시키며 열원을 만드는 원자력은 순수하지 않다.

온기는 온기되 전달되는 내용이 다른 것이다. 설탕이나 사카린이 당도는 높되 곡식이나 과일에서 추출한 단맛보다 빨리 싫증나는 것과 같다.

순수한 온기는 바람을 막아주는 동굴, 스스로 발열하는 짚더미, 새의 깃털같은 것에서 생성되고 보존된다.

동굴은 인류를 감싸준 근원적 보온장이다.

큰 바위가 홈이 파이거나 비스듬히 얽혀 있는 공간을 보면 자연스레 눈길이 끌린다. 피신하고 엄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끌림은 아주 오래전 동굴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비와 바람, 그리고 맹수로부터 보호해 준 동굴은 우리의 피 속에 녹아있는 위안이다. 파인 바위는 동굴의 변형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는 전통 가옥도 동굴의 변형이다.

풀을 쌓은 두엄에서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도 순수하다. 들판에 쌓인 짚더미도 그렇다. 짚더미는 방랑자의 여인숙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수가 끝난 뒤 짚단을 높이 쌓았다. 짚단을 몇 개 빼내면 무너지지 않고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에 들어가면 안온했다. 짚단이 자연숙성되면서 내는 열기가 전해졌다.

겨울철 농촌의 어릴 적 놀이 가운데 하나가 볏짚 속에 숨기였다. 온갖 상상을 하며 그 짚단 속에 들어가곤 했다. ‘엄마찾아 삼만리’나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같은 영화를 보고 스스로 고아가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노을이 지고, 지붕마다 밥 짓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모습을 보고도 집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짚더미 속에서 듣는 바깥의 바람소리가 세찰수록 희열이 커지는 것이었다. 야성의 추억일 것이다.

어떤 용감한 친구는 짚더미 속에서 밤을 세우는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두려움 속에 하룻밤을 지낸 대가는 컸다. 어둡고 추운 겨울 밤 홀로 들판의 짚더미 속에서 밤을 보냈다는 소문은 교내에 퍼졌고, 겁 없는 그에게 경외의 눈길이 쏠렸다.

이제 짚더미는 없다. 새끼를 꼬거나 이엉을 만들 일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겨울을 나는 소의 김치로 쓰기 위해 똘똘 뭉치고 흰 비닐로 칭칭 감아 놓았다.

새의 체온도 순수한 온기에 해당한다.

어느 겨울 사다리를 타고 초가지붕 서까래에 난 여러 개의 구멍 가운데 하나에 손을 넣었다. 새의 부드러운 깃털이 만져지면서 온기가 느껴졌다. 참새였다. 녀석들은 두서너마리씩 짝을 이뤄 서까래 구멍에 깃을 튼 것이었다. 얼른 손을 뺐다. 참새도 놀란양 옆 구멍을 통해 달아났다.

나뭇잎이 진 뒤 새들이 어떻게 겨울을 날지 가련히 여기지 않아도 된다. 자연은 그들에게 살기 알맞은 여건을 허락했다. 수많은 깃털이 높은 온도차를 극복하도록 진화돼 있다. 어떤 새의 깃털안과 바깥의 온도 차이는 78도나 된다고 한다. 떡갈나무 잎이 떨어진 겨울에 비를 어떻게 피하겠냐고 걱정하지만 깃털의 방수기능이 해결한다.

소박한 온기만으로 생존했다는 것을 기억하면, 낙엽이 예고한 불안도 떨칠 수 있다.

<김한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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