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 끝이 무디어지면 세상이 썩는다
펜 끝이 무디어지면 세상이 썩는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1.11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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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축에 든다. 한편 또 다른 출발을 위해 꿈과 힘을 갈무리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11월은 마무리와 출발을 함께하는 시간이라고들 한다. 이렇게 정리와 시작이 함께 하는 6년 전 11월, 울산제일일보가 세상에 나왔다.

벌써 여섯 해인가. 잡힐 듯 선명한 그날을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척박한 지방신문 환경을 무시하듯 모두가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기어이 좋은 신문 하나를 만들겠다며 기염을 토하면서 창간호를 낸 지 벌써 6년의 세월이 지났다. 창간 6주년을 축하한다.

울산제일일보가 새로운 세상 속으로 다시 뛰어드는 이 시간, 신문의 길을 되짚어 본다. 현대 대중신문이 생겨난 이후 신문은 그날그날의 세상사를 기록하는 사관 역할을 해 왔다. 역사란 문자로든, 한 장의 그림으로든 기록돼야 역사가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저 지나간 시간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신문이 당대의 일들을 제 맘대로 뒤틀고 첨삭하며 한 쪽 비위만 맞출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신문은 권력자의 편에서가 아니라 민중의 편에서 역사를 쓴다. 말하자면 국사편찬위가 권력과 제도의 역사인 삼국사기를 쓴다면 신문은 당대의 보통사람들의 삶의 환희와 애환을 남기는 삼국유사를 쓰는 셈이다. 왕의 시대는 세상이 왕의 것이었다. 그러나 민중의 시대에 세상은 민중의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바른 신문이 쓰는 민중의 역사가 바로 정사(正史)이다.

신문은 또 미래이다. 신문에 새롭다는 뜻이 담긴 신(新)자를 쓰는 이유는 신문은 세상 초유의 것을 들려주기도 하지만 펼쳐질 새로운 미래를 미리 알려주는 선구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신문은 현재의 비판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그려내 보다 행복한 사회로 이끌어 가야 한다.

미래의 신문은 현재보다 한 발 앞서가야 한다. 미래를 먼저 읽고 기획하고 선도해야 하는 것이다. 미래를 읽고 기획함이 없이 창조를 외치는 것은 헛구호일 뿐이다. 이런 창조는 멀리 보고 앞서 가는 제대로 된 신문이 받쳐주지 않으면 헛일이다.

좋은 신문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 이념의 시대에 신문은 굴절된 권력에 저항하고 비판하는 지사(志士)의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의 일부분일 뿐 우리의 미래는 아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맹목적 이념의 저울추가 아닌 공정하고 불편부당하지 않는 정론직필이 필요하다.

정론(政論)신문 보다 정론(正論)신문이 더 좋은 신문이다. 크든 작든 권력은 신문에게 용비어천가를 바라고, 신문은 늘 훈민정음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그래서 신문은 언제나 가르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신문은 가르치는 교사이기보다 기쁨과 애환을 함께 나누는 친구여야 한다. 훈민정음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리를 제대로 듣고 다시 바르게 세상에 전하는 민성정음(民聲正音)이 돼야 한다.

작년 이맘 때 쯤으로 기억한다. 울산제일일보 임직원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단물이 있는 곳만 보지 말라’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신문의 숙명은 단 것, 따듯한 것, 쉽고 편한 것 보다 쓰고, 춥고, 힘들고 험한 것들과 친해야 하는 것이다. 울산제일일보는 쓰고 춥고 힘든 곳을 더 사랑하고 더 살펴라. 그래야 산다. 좋은 신문이 좋은 세상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좋은 지역신문이 좋은 울산을 만들 것이다.

또 좋은 독자가 좋은 신문을 만든다. 무한정의 사랑으로 자식을 잘못되게 만드는 사람이 결코 좋은 어머니가 못 되듯이 좋은 독자는 따듯한 사랑과 함께 눈물진 회초리를 들 줄 알아야 한다. 늦어가는 가을빛, 참 좋은 동짓달이다. 제호가 말하는 ‘울산제일’의 신문을 넘어 그냥 제일이 아니라 더 좋은 신문, 참 좋은 신문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신문의 펜 끝이 무디어지는 그때부터 세상은 썩기 시작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기를 바란다.

<박기태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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