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낙엽
젖은 낙엽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1.10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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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허락도 받지 않고 벌써 단풍 들었다며 푸념하던 어느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가을은 소리 없이 깊어간다. 문득 초록 머플러에 브라운색 트렌치코트 깃을 세우며 “가을은 단언코 남자의 계절”이라던 L교수의 Y담유머가 뇌리를 스친다. 꽃소식은 아래동네에서 위쪽으로, 단풍은 윗동네부터 물들어 아래쪽으로 내려가고 꽃소식은 더디 올라가고 단풍 물드는 속도는 빠르다했던가. 꽃으로 비유되는 여자는 치마를 올리고 단풍으로 빗댄 남자는 바지를 내린다는 우스갯 소리로 가을밤을 물들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필자의 컴퓨터 책상 앞엔 인생시계가 놓여있다. 베스트셀러 ‘아프니까 청춘이다’ 책의 부록이었던 이 시계가 어느 순간부터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저자는 한국인의 평균수명을 80세라고 가정하고 1년에 18분씩 나이가 흐르는 시계라고 친절한 설명을 달아 놓았다. 그러니까 인생시계는 10년에 3 시간씩 나이가 흐르는 셈이다.

내 나이도 오후를 살짝 넘긴, 계절로 치면 초가을쯤 될까. 인생시계를 들여다보며 올해의 가을이 남달라 보이는 까닭도 인생에 있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계절임을 새삼 알았기 때문이다.

한 방 쓰는 내 짝꿍, 남편은 요즘 가을을 타는지 병든 닭같이 쳐져있기 일쑤다. 우울증이라고 자가진단을 내리는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 흘렸더니 서운한 속내를 슬쩍 드러낸다. 그러고 보니 남편은 며칠 혓바늘이 돋아서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한 적도 있었고 자다가 옆구리가 허전해서 깨보면 거실에 나가 텔레비전을 켜놓고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것도 같았다. 최근에는 술을 마시고 들어온 적도 거의 없다. 오랜 직장생활에 지쳐서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필자는 눈치도 보고 때론 배려하려고 애를 써보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심정에 만감이 교차한다.

알고 지내는 P기자는 가을에 접어들면서 스마트폰 밴드에 가을풍경과 함께 수시로 시를 써서 올린다. 시를 올리는 시간이 대부분 자정을 훨씬 넘길 때가 많다. 어쩌면 필자의 남편처럼 그도 불면의 밤으로 가을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얼마 전 아는 이의 남편이 직장에서 퇴출을 당하고 아내 모르게 1년을 퇴직금으로 전전긍긍하다가 차마 하지 못한 말만 남겨두고 투신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런 잔인한 현실들이 꽃이 피고 잎이 지는 계절의 순리만큼 놀랍지 않은 일상이 됐다.

매연에 찌든 가로수마저 가을앓이를 하는데 남자라고 계절을 타지마라는 법도 없지 싶다. 그들도 때론 소리 내어 울거나 휴가를 받아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남편처럼 밥줄 떨어지는 소리가 가까워지거나 혹은 희망의 100세시대가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불안의 그림자를 안고 사는 중년의 가장들은 더구나 이 계절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테다.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거나 마누라 치마꼬리에 들러붙는 자신들을 젖은 낙엽이라며 비아냥거려도 발끈 않는 걸 보면 격세지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젊은 한 때처럼 허세도 부려보고 귀여운 거짓말이나 적당한 눈속임으로 아내들을 긴장시켰던 시절이 때론 그립기도 하다.

아내는 권위적이지는 않지만 권위는 지니고 있는 상 남자를, 남편은 관심 받으려고 엄살을 떨거나 계절병을 앓아도 모른 척 받아주는 아내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 모든 아내와 남편들이 서로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다가 이제는 어느 간이역에서 쉬엄쉬엄 쉬어갔으면. 내 남편이 젖은 낙엽이면 어떻고 치마꼬리를 붙들면 어떠리. 부부에서 친구로, 애정이 우정으로, 설령 동지로 바뀌는 최악의 경우라도 받아들여야지.

비가 내리는 일요일 아침,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손잡고 젖은 낙엽 길이라도 밟아야겠다.

<박종임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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