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포 선사인의 옥(玉)귀걸이
개운포 선사인의 옥(玉)귀걸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1.06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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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복천박물관 특별전시실에는 울산의 옥 유물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귀에 거는 장신구였다. 이 옥은 울산의 개운포 바닷가인 처용마을에서 출토된 것이다. 이 옥 귀걸이는 우리나라 곳곳서 발굴된 1천300여점의 옥 유물 가운데 선택해 전시하는 곳에서 자신의 존재를 또렷이 보여주고 있었다.

고대 울산의 옥은 지금의 다이아몬드와 같은 가치였을 것이다. 아주 먼 곳에서 가져 왔으며, 그만큼 희귀했다. 옥 귀걸이 크기는 500원짜리 크기만 했다. 그녀가 지녔던 옥 귀걸이는 오늘날 네온사인이 현란한 삼산의 백화점 거리에 등장해도 무색치 않을 디자인이었다.

옥 귀걸이는 그것을 갖춘 여성의 실체를 상상하게 했다.

그녀는 뽀얀 화장도 하지 않았고 기름떼 낀 가죽 옷을 걸쳤을 것이다. 머리카락은 거칠고 길었을 것이며 손톱도 가지런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닷가 숲이 우거진 원시마을에 무슨 뽐낼 일이 있어 귀걸이를 했을지 갖은 상상을 하게 했다.

사치인가, 신분표시인가?

그녀는 작은 수장의 딸이거나, 모계사회의 우두머리일수 있다. 그렇다면 국가라는 것이 생기기 전 아득히 먼 시기 개운포에 심미적 가치가 공유되는 사회가 있었던 것일 게다.

옥 유물이 발굴된 처용리는 현존하는 우리나라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서에 지명을 올린 유서 깊은 고을이다. 2013년 현재 산업시설을 확충하고 있다. 옥 귀걸이는 이 사업과정에 발굴됐다. 수천년동안 땅 속에서 묻혔다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 형태와 빛깔은 변함없다.

우리는 지금 개운포에서 숲이 제거된 땅을 보고 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에는 원시림 상태였다. 모든 땅은 삼림과 습지였다. 그런 곳에서 옥 귀걸이를 한 여성이 있었으니 기이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옥은 그것을 지닌 존재를 드러내는 중요한 표시다.

옥은 지금도 소중히 여긴다. 옥의 용도를 거슬러가면 조선시대 양반의 갓을 늘어뜨린 대롱에 끼웠다. 신라때는 금관이나 허리띠를 장식했다. 그 이전의 선사시대에는 귀걸이나 목걸이로 사용됐다.

옥 전시회를 기획한 복천박물관 하인수 관장은 “고대인들은 처음에는 동물형상을 가진 바위에 애착을 가졌고, 다음은 동물의 뼈를 소중히 여겼고, 그 다음으로 옥의 가치에 눈을 뜬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옥은 고대로부터 여러가지 덕목을 지녔다고 알려져 왔다.

어떤 돌보다 따뜻하고 윤택하므로 몸에 지니기 좋다. 견고하지만 부드러워 가공하기 쉬웠다. 소리가 맑지만 요란하지 않다. 그래서 천하를 다스리는 존재는 도장을 옥에 새겼다. 그것이 옥새다.

옥은 개운포 일대에서 생산되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산지가 경주나 진주다. 선사시대인들의 하루 최대 이동거리는 25㎞쯤으로 추정되고 있다. 개운포 옥은 그때의 유통경로가 지금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멀다는 것을 알려준다.

오늘날 예쁜 미옥(美玉), 어진 순옥(順玉), 착한 선옥(善玉), 기쁜 희옥(喜玉)… 이런 이름을 짧게 ‘옥아!’라고 부른다. 여동생이나 친구를 이렇게 불러보지 보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드물 것이다.

옥은 지금도 정겹고 귀한 대우를 받는다. 5천년전 개운포 원시림 속에서 옥을 귓불에 달았던 그 여성의 후예들이 우리다.

옥에 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 복천박물관 옥 전시회는 이번 주말인 10일에 끝난다.

<김한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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