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習)의 철학
습(習)의 철학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0.0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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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를 때 키가 훌쩍 큰 나무 밑에 새끼 새가 죽어있는 것을 가끔 발견할 때가 있다. 우리는 어쩌다가 나무위에서 추락해 죽은 것이겠지 하고 그냥 지나친다. 그러나 한걸음 물러서서 잠시 생각해보면 하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새끼 새의 주검은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 추락했을까?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는 것인가? 분명 다 자라지 못한 날개가 있는데 어떻게 덜어져 저렇게 죽은 것일까?

원인은 다자라지 못한 날개를 가지고도 날수 있을 것이라는 퍼덕임을 하다가 추락한 것이다. 무모함의 대가일 수밖에 없다. 충분한 연습이 없는 미완성의 날갯짓은 추락을 뜻할 뿐이다.

새는 날개가 다 자라면 이소(離巢)를 위해 둥지에서 날갯짓을 계속한다. 즉 날기 위한 연습을 충분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새들의 습관이고 습성이다. 새들은 다 성장해서 날게 돼도 날갯짓을 계속해야 창공을 마음껏 날 수 있다.

다시 말해 새는 계속 나는 연습에 복습, 예습을 해야만 하는 조물주의 섭리를 부여 받은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익힐 습(習)’의 철학이 있다.

인간은 태어나서부터 ‘習’이 곧 성장의 기초가 된다. ‘習’을 통해 개성 있는 습관과 습성을 인간성 내면에 정립한다. 그런데 성인이 돼 사회생활에 동화되면서부터 이 ‘習’을 까맣게 잊어간다. 그리하여 파생되는 온갖 시행착오로 절망과 좌절의 사회적 혼돈을 맞게 되는 수가 허다하다. 성장과 내면의 기초 요소를 상실하니 그럴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날갯짓을 계속해야 창공을 나는 새, 연습의 날갯짓은 꾸준한 노력이다. 모든 일의 성취는 끊임없는 연습의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일상에서는, 날갯짓을 접는 새의 추락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추락을 막기 위한 ‘습(習)’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영어의 리허설(Rehearsal)도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연극, 음악, 방송 등에서도 공개를 앞두고 피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 리허설의 강도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

‘나로호’도 발사 전 충분한 리허설을 했으나 공중폭발했다. 그리고 발사중지 등 실패 끝에 마침내 성공했다.

끊임없는 리허설! 즉, 연습을 통해서 0.01%의 부족함을 찾아내 완벽한 성공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 그거 그냥 연습이야”하고 연습을 장난처럼 경시한다. 연습은 연습으로 끝나게 두는 것이 아니라 연습은 성공의 중대한 날갯짓임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익힐 습(習)자를 파자하면 깃우(羽)변에 흰백(白)이다. 즉 하얀 새의 깃털은 날기 위한 연습, 복습, 예습의 상징으로 익힐‘습(習)’자의 철학이 숨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도모하는 일들에 항상 ‘습(習)’의 철학이 접목된다면 혹여, 살다보면 닥칠 수 있는 추락에도 반드시 그동안 연습으로 비축했던 힘의 힘찬 날갯짓으로 추락의 저 아래서 다시 날아오르는 도약의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이 분명한 사실을 늘 기억하는 사람들의 성공 이야기는 우리에게 언제나 감동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날개를 가지고 일상에서 연습의 퍼덕임이 끊임없이 있어야 하겠다.

<이영조 상이군경회 중구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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