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문학청년을 떠나보내며
영원한 문학청년을 떠나보내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10.03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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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오래 남아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게 주어진 이 막막한 백지와의 인연을 이어갈 것이다. 내가 쓴 보잘 것 없는 글들이 이 가난한 세상에 작은 위로의 눈발이 될 수 있도록. 그 누군가의 헐벗은 이불 속 한 점 온기가 되어 줄 수 있도록. 나는 저 눈 내린 백지 위를 걸어갈 것이다.’(최인호의 ‘인연’ 중에서)

지난달 25일 ‘영원한 문학청년’ 최인호 작가가 우리 곁을 떠나 ‘별들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향년 68세. 지난 5년간 지병인 침샘암으로 투병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는데, 아직 세상을 뜨기엔 이른 나이라 안타깝기만 하다.

필자가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고교시절 신문 연재소설이었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상큼한 신문을 집어 들어 다른 뉴스거리보다 그의 소설을 먼저 찾아 읽곤 했다. 그 무렵 고향의 허름한 U극장에서 뒤늦게 동시 상영된 ‘별들의 고향’을 보기도 했다. 대학시절에는 리얼리즘 소설에 보다 관심이 쏠렸지만 최인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고래사냥’ 시리즈와 ‘깊고 푸른 밤’ 등은 빼놓지 않고 봤다.

고인은 ‘해방둥이’로, 1945년 10월 평양에서 3남 3녀 가운데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같은 해 12월 갓난아기일 때 변호사인 아버지를 따라 어머니의 품에 안겨 서울로 온다. 6·25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피란지 부산에서 초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얼마 뒤 2학년으로 월반할 만큼 명석함을 보여 주변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고 한다.

서울 중·고등학교를 거쳐 1972년 연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고인은 1963년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벽구멍으로’라는 단편을 응모해 입선, 1967년에는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이후 ‘1970년대 작가군의 선두 주자’라 불리며 군부독재와 급격한 산업화로 인한 인간 소외가 극을 이루던 1970년대 초 한국문단에 ‘소설 붐’을 일으켰다.

그는 1970년대 청년 문화의 중심에 서 있던 작가였다. 세련된 문체로 ‘도시 문학’의 지평을 넓히며 그 가능성을 탐색한 그는 황석영, 조세희와는 또 다른 측면에서 1970년대를 자신의 연대로 평정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1973년 혈기 왕성하던 시절 최인호는 파격적으로 ‘조선일보’에 소설 ‘별들의 고향’을 연재하게 되는 행운을 거머쥔다. 이른바 대중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경아’는 평범한 집안의 외동딸로 태어난다. 하지만 첫 연애에서 남자로부터 버림받고 나이 차이가 많은 상처(喪妻)한 남자와 결혼, 실패한 뒤 술집 호스티스로 전락한다. 결국 여주인공의 죽음이 비극적으로 마무리되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별들의 고향’은 대중 소설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신문에 연재될 때부터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켜 단행본으로 묶여 나오자 단숨에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영화로 만들어져 큰 인기를 끌었다.

이밖에도 그는 군부독재와 급격한 산업화라는 1970년대의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 무렵 관심을 끌지 못하던 장르인 시나리오에도 관심을 가져 ‘바보들의 행진’, ‘병태와 영자’, ‘고래 사냥’ 등을 통해 시대적 아픔을 희극적으로 그려냄으로써 독특한 시나리오 세계를 구축하기도 했다.

그는 “1960년대에 김승옥이 시도했던 ‘감수성의 혁명’을 더욱더 과감하게 밀고 나간 끝에 가장 신선하면서도 날카로운 감각으로 삶과 세계를 보는 작가”(조남현)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호스티스 작가’, ‘퇴폐주의 작가’, ‘상업주의 작가’라는 달갑지 않은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작가 최인호는 누가 뭐래도 7080세대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그야말로 전국의 젊은 감수성이 최인호 신드롬으로 수렴되던 그 시절의 상징이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투병기간 내내 “환자가 아닌 작가로 죽고 싶다”고 했던 그는, 세상을 떠나기 보름 전 병상에서 ‘마지막 시’를 남겼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글쓰기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그의 유고시(遺稿詩)를 읊조리며 ‘영원한 청년’ 최인호 작가를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보낸다. 그의 영면(永眠)을 빈다.

‘먼지가 일어난다/ 살아난다// 당신은 나의 먼지/ 먼지가 일어난다// 살아야 하겠다/ 나는 생명, 출렁인다’

<김부조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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