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문객들
‘……’ 방문객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9.2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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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에 보면 ‘……’ 이라는 코너가 있습니다. 인사를 온 딸의 남자친구라든지 오늘 처음 만나는 사돈 등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 어색하고 불편해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괜히 주변만 두리번거리고 시계 초침소리가 그 어느 때 보다도 공간을 가득 메웁니다. 곤혹스런 지금의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이가 빨리 좀 나타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고 괜히 꺼낸 말 한마디가 괜한 실수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이럴 때 이런 저런 얘기를 꺼내며 금세 상대와 친해지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성격이 좋다거나 사회성이 있다거나 하는 얘기를 하는데 우리의 일상에서 이런 상황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납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언젠가부터 화장실 변기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리더니 갈수록 그 소리는 크고 선명해졌습니다. 관리비 명세서가 날아왔을 때 세배정도 늘어난 수도세를 보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아파트 관리실에 전화를 했어요. 부속을 바꿔야 한다 해서 철물점에 가 부속을 사다 놓고 기다리는데 씨름선수를 연상케 하는 체격에, 인상이 썩 좋지 않은 남자분이 공구박스를 들고 방문했습니다. 추석 지나고 첫 출근이라 일이 많았는지 표정이 밝지가 않습니다. 개콘에서 봤던 어색한 상황. 시간이 안갑니다. 거기다 지난번에 봤던 무서운 뉴스들이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불안한 마음에 손에는 핸드폰까지 꼭 쥐고 거실에 앉아 책보는 척을 하며 빨리 저 분이 가시기만을 기다립니다. 부속교체가 끝나고 냉장고에 있던 요구르트를 하나 건넸더니 한 번에 마시고는 가십니다. 그제 서야 쥐고 있던 핸드폰을 내려놓는데 살짝 미안한 마음이 스칩니다.

지난겨울 어느 날은 다용도실에 있던 드럼세탁기가 얼어붙어 작동이 되지 않았습니다. 난감한 상황에 AS센터에 전화를 하니 인상도 좋고 고객님께 매우 친절한 기사분이 오셨습니다. 그날도 수리를 하는 동안 저는 거실에 있었는데 저쪽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들립니다. 기사분 아내 같았는데 아침에 다투고 나왔는지 뭔가를 논쟁하다가 “지금 일하니까 끊어”하며 사납게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갑자기 다시 불안해집니다. 폰을 꼭 쥐고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립니다. 시간이 안갑니다. 마침내 수리를 마친 기사분이 나가면서 평가하는 전화가 오면 ‘매우 만족’으로 답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필자는 아내에게나 매우 만족 평가를 받도록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해가 갈수록 작업실에서도 집에서도 혼자 있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럴 때 마주하게 되는 한 공간 두 사람의 구도는 삶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입니다. 이것은 단지 사회성이 있거나 성격이 좋은 것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바로 사회에 대한 불신이 이유 없는 불안을 증폭시킨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뉴스에서 연일 보도되는 성범죄 사건들은 이 사회에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걱정되고 시시때때로 마음을 졸여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유 없이 사람을 경계하거나 의심하는 일이 얼마나 미안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 잘 알지만 경계를 늦추기에 우리사회는 참으로 많은 일 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사람을 무턱대고 믿자니 불안스럽고 그렇지 않으면 상대방을 턱없이 의심하는 것 같아 미안스러운 사회에 살고 있는 셈이죠. 그러니 괜히 믿었다가 불상사를 당하느니 우선 의심·경계부터 하는 게 요즘 우리 생활 주변 분위기 아닌가요.

긴 연휴를 마치고 오랜만에 작업실에 갔더니 예상치 못한 방문객이 찾아왔어요.

말없이 그저 바라만 보아도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그런 손님 말이죠. 분홍의 별사탕 같이 생긴 난생 처음 보는 꽃이었는데 이름을 몰라 ‘꽃님이’라 지어주었어요. 뭐가 그리도 그리웠는지 혼자서 열세송이나 되는 꽃을 피운 꽃님이가 수줍게 웃었지만 말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꽃은 쉽게 보기 힘들다는 ‘호야꽃’이었어요. 호야꽃이 피면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긴다는데 이 가을 부푼 희망까지 안겨주는 고마운 꽃님이 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방문객을 마주하고 있으신가요? 꽃님이처럼 말없이 함께하기만 해도 행복한 방문객인가요. 아니면 시종일관 어색함의 ‘……’인 분인가요. 그 어색함을 깨뜨리기 위해 여러분은 어떻게 하고 계신가요. 겉으론 태연한 체 하면서도 상대방의 움직임 하나까지도 의심·경계하고 계시는 건 아닌가요.

<이하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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