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포는 한국인의 고향
개운포는 한국인의 고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9.25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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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한국인의 고향은 울산항 안의 개운포다. 개운포는 한국인의 성지다.’

아직 누구도 제시한 적 없는 가설이다. 필자는 이 가설의 타당성을 설명해 보려고 한다. 이 가설이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라면, 지금 개운포 일대에서 벌어지는 개발행위는 정돈돼야 하며, 또 이 일대에서 행하는 문화행사에 더 깊은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여기서 한국인이란 김, 이, 박씨처럼 대성을 이룬 한반도인이다. 이 성씨의 시조들은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박, 석, 김씨와 신라를 구성한 6개 촌의 6부성이다. 6부성은 이, 정, 최, 손, 설, 배씨다.

이들은 삼한통일의 주역이며, 지배계급으로 후손을 늘려왔다. 신라가 통일한 뒤 1천년간 한반도에는 9개 성씨가 주를 이루고, 중시조를 이뤘다.

서강대 총장이자 역사학자인 이종욱 박사는 “1985년과 2000년에 각각 실시한 인구센서스에서 한국인 다수가 신라인을 시조로 하는 성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삼한통일 이후 피정복민이 된 백제와 고구려인은 사회·정치적으로 도태됐고, 이후 한국역사의 주인공은 주로 신라인이었다.

이 부분에서 내릴 수 있는 작은 결론은 한반도인 다수는 신라 경주의 씨족 후예라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한다면, 개운포 성지 가설을 이해하는 데 다가간 셈이다.

경주의 6부촌은 농경시대인이 구성한 집단이다. 경주는 평야가 넓다. 이들은 서기 100년 전후 사람이다. 이사금이나 마립간에게 세력이 모이기 시작한 역사시대에 가까이 들어선 사람들이다.

그럼 6부촌의 조상은 어디인가를 생각해보자.

농경 이전에는 물고기와 동물을 잡아먹고 살던 선사시대이다. 즉 선사시대 사람들이 어디서 살았는가를 알면 경주 6촌 사람들의 본 고향을 알수 있다.

여기서 고고학 지도를 펴보면, 경주는 역사시대 유적이 곳곳에 있다. 그 옆 울산에는 선사시대 유적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울산의 선사시대 유적은 한반도에서 가장 밀집돼 있다. 포항과 경주 부산 권역은 그 밀도에서 따라올수 없다.

울산에 선사시대 유적이 왜 많은가는 그 시대의 생활방식인 수렵어로를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산과 강과 바다 그리고 따뜻한 곳이 그들의 삶터였다.

울산은 해가 가장 빨리 뜨고, 항아리형 해안이 비교적 많다. 거기에다 난류와 한류가 만나고 플랑크톤을 많이 생산하는 ‘냉수대’란 세계적으로 희유한 해역을 가지고 있다. 이 해안 특성이 선사 유적이 많은 이유를 시사한다. 울산지역 선사인들이 농경기술 발달과 함께 대거 내륙 경주로 진입했다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들어간 길목도 짐작된다. 삼국유사와 현재의 지형을 감안해 보면, 울산 두동면과 경주 내남면 쪽에 들어간 사람들은 ‘돌산고허촌’의 최씨 족을 이뤘다. 울산 농소와 경주 외동으로 들어간 족은 ‘자산진지촌’의 정씨라고 볼 수 있다. 다른 성씨는 이들보다 뒤에 더 먼곳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납득된다면, 이제 개운포가 왜 핵심거점인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개운포는 용이 등장하는 설화가 생겨나고, 신라의 왕이 직접 방문했다. 그럴만한 문화사적 저력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죽패총에서 발굴된 것은 지금부터 3000년 이전에서 7000년 사이 유물이다. 도토리의 떫은 맛을 제거하는 저장소를 비롯 그들이 먹고버린 바다와 육지의 온갖 생물 뼈가 가득했다. 흙을 구워 만든 그릇이나 인형 조각들이 2만여점 나왔다. 그리고 몇 년뒤 인근에서는 사슴뿔을 다듬어 만든 작살촉이 박힌 고래뼈가 여러점 나왔고, 당시로는 아주 정교한 토기도 나왔다. 이 유물들의 가치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것으로도 입증된다.

개운포에는 이 외에도 선사유적이 즐비하다. 이 유적을 남긴 집단이 경주에 가서 신라인이 됐으며 한국인의 주류가 됐다.

이 가설이 틀리지 않다면, 구름을 걷어내고 새 세계를 열어준 개운포(開雲浦)는 한국인의 고향이다.

<김한태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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