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움의 시간
채움의 시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3.09.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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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연주하는 독주의 아름다움은 시간이다. 독주의 선율은 홀로 버틴 시간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둘이서 함께 하는 2중주의 미덕은 배려다. 서로를 챙기는 눈길에서 둘의 소리가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셋이서 내는 음의 이름은 화음이다. 어울릴 줄 아는 아름다운 음들이 모여들기 때문이다.

네개의 소리가 어우러지는 4중주는 채움이다. 줄달음질 치는 퍼스트 바이올린을 쫓는 세컨드 바이올린의 숨 가쁨을, 둘 사이에서 울리는 비올라의 새된 비명을 묵직한 첼로의 저음이 채워줘야 비로소 소리가, 음악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한가위가 드디어 지났다. ‘드디어’라는 부사를 붙인 까닭은 아마도 지독하게 더운 올 여름을 겪은 뒤에 찾아온 중추절이어서도 아니고 다른 때보다 더 둥글고 커다랗던 보름달 때문도 아니다. 초승달 때부터 시장을 종종거리며 누볐을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찬사의 의미다. 무거워지는 마음 때문에 달이 차오르는 것을 외면하고 싶은 때도 있었으리라. 성가신 마음에 이맛살도 찌푸렸으리라. 하루가 다르게 차오르는 달을 미워하는 마음도 들었으리라. 그렇지만 추석날, 어김없이 남쪽 하늘 높이 솟아오른 보름달을 올려다보지 않았을 이 또한 없으리라.

달빛으로 꽉 찬 밤하늘을 보면서 문득 얼마 전에 본 영화 ‘마지막 4중주’가 생각났다. 음악에 대해, 특히 클래식에 대해 알고 보면 훨씬 의미가 남다를 것만 같은 영화였다. 글자를 안다고 글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영화는 네명으로 이루어진 25년 된 ‘푸가’ 현악4중주단의 이야기다. 사랑이야기도, 그렇다고 음악으로만 채워진 영화는 아니다. 사랑과 눈물과 배신과 분노가 적절히 음악에 섞였다. 어울려 연주를 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 그런지 서로 간섭과 개입이 제법 많은 이야기였다.

원칙주의자인 대니얼(제1바이올리니스트)에겐 끊임없이 들이대는 어린 사랑이 있다. 그녀는 바로 같은 현악 4중주단인의 일원인 로버트 부부의 딸이다. 대니얼에게 딸을 빼앗긴 로버트(제2바이올리니스트)는 주먹을 휘두른다. 연습시간은 엉망이 되었다. 줄리엣(비올리스트)은 어린 딸의 반항과 남편의 부도덕한 행동에 절망한다. 넷을 이끄는 늙은 스승이자 리더인 피터(첼리스트)조차 파킨슨병을 얻어 투병중이다. 떨리는 손가락과 희미해지는 기억 때문에 피터는 중주단을, 음악을 내려놓아야할 처지였다. 호수와 공원을 꽁꽁 얼린 추위만큼이나 단원들의 마음은 차갑게 굳고 멀어져갔다.

갈래갈래 찢어진 4중주단. 쉬운 게 하나 없다며 한숨을 쉬는데 영화는 훌쩍 뛰어넘어 결말, 마지막 연주장면을 보여준다. 관객으로 가득한 홀. 네명의 연주자가, 현악 4중주단인 푸가의 단원들이 입장한다. 바이올린이 번갈아 울리고 비올라가 음을 잡고 첼로 소리가 홀을 채워 나간다. 음악과 이별을 준비하던 피터의 손가락이 멈춘다. 곱은 손가락은 첼로를 타지 못한다. 연주가 멈춘다. 침묵. 그를 바라보는 단원들의 눈가에 눈물이 어린다. 관객을 향해 피터는 일어선다.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은 7악장이라고, 중간에 끊김없이 연주해야 한다고, 하지만 여기서 그쳐야, 여기까지라고 말한다. 피터의 마지막은 의연해서 더 찡했다. 관객과 함께 연주를 듣는 피터의 미소가 그윽했다. 영화가 끝난 후 흐르는 음악, 베토벤 현악4중주 14번은 온 몸으로 몰려왔다.

보름달을 향하던 내 눈길이 곁에 선 이들에게 옮겨간다. 형님의 오똑한 콧날엔 아직도 달빛이 환하다. 셔터를 누르는 조카의 어깨는 아직도 들썩인다. 아이의 고개는 한껏 젖혀져 있다. 남편의 눈길과 내 눈길이 마주치고 입가엔 어느덧 미소가 흐른다. 내년에 아니 후년에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오늘처럼 함께 달맞이를 할 수 있을까? 동요를 함께 흥얼거리며 웃을는지 궁금해진다.

구름이 몰려와 달을 덮는다. 먹빛 하늘에 달무리가 어린다. 구름에 숨었던 달이 얼굴을 드러내자 밤하늘이 다시 환해진다. 가슴을 그득 채운 달빛은 그동안 드리운 마음의 그늘을 말끔히 씻고도 남으리. 초승달이 반달을 지나 배를 부풀려 보름달이 되듯이 우리의 마음은 둥실둥실 달처럼 솟아오른다. 독주의 시간을 견딜힘, 배려를 배울 여력, 아름다운 음들을 골라낼 혜안으로 채워지는 밤이다. 달 밝은 밤은 계속 이슥하다. 보름달도 아직 여전하다.

<박기눙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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